[종상] 게이트 생존 지침서: 백업용 (2024)

※유혈 및 인체 실험 등 비윤리적 묘사 주의

게이트 생존 수칙 제0번.

처음부터 게이트에 휘말리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게이트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칠 일도 없을 것이다.

출근하다 난데없이 게이트에 휘말린 기상호가 허망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라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기묘한 하늘. 노을이 질 때가 아니면 띨 리 없는 색이다. 그리고 지금은 명명백백히 아침이고. 기상호가 갑자기 기절했다가 10시간 후 깨어난 게 아니면 저런 색을 띨 리 없다는 소리다.

기상호는 침착하게 게이트 정보를 확인했다. 생존 난이도 S급. 망했다. 시스템 창 위로 9급 헌터 기상호 하나로는 살아남기도 힘든 악조건이 줄줄이 이어졌다.

내 오늘 이케 죽을 운명인가 보다……. 기상호가 울었다.

게이트와 몬스터가 범람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9급 헌터 기상호, 죽을 날을 받다.

게이트 생존 지침서

게이트 생존 수칙 제1번.

만약 당신이 각성하지 않은 민간인이거나, 혹은 전투 능력이 없는 각성자일 때 게이트에 휘말렸다면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라.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생존 수칙이다.

기상호가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혹자는 답할 것이다. 기상호가 누군데요? 얼굴 그럭저럭, 키는 대한민국의 평균을 훨씬 웃돌지만 이 시대에 187cm는 그렇다 할 장점이 되지 못한다. 신체 능력은 민간인에 비한다면 뛰어나다지만 이조차 헌터의 기준에선 최하급 수준. 특출나게 잘난 점 하나 없이 이 험난한 대 게이트 시대를 살아가는 9급 헌터 기상호. 소속된 길드에서는 영원한 막내요, 그나마도 쓸모를 찾을라치면 단점만 더 부각 된 애물단지.

그래도 짬밥 좀 쌓인 2년 차 헌터 기상호는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는데……. 이는 다름 아닌 특출난 머리를 사용해 공략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능력이 사랑받지는 않았다. 씨바 거, 그래서 게이트에 못 들어가면 아무 소용없는 거 아니냐? 님, 그래도 힘내셈! 님 없었음 우리 길드는 진작 망했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길드원이 단 7명밖에 없는 길드에서 한 명이 빠지면 망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어쨌든 지상최강 소속의 9급 헌터 기상호는 지금 꽤 많이 망한 상황과 마주했다. 안 그래도 험난한 인생, 이런 시련까지 올 필요가 있나. 기상호가 웃었다. 하하. 내 여서 죽으면 트x이건 만화책도 함께 불태워 도……. 누군가에게 들릴 리 없는 유언이었다.

망한 건 망한 거고,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정하기 위해선 알아놔야 할 게 많았다. 현신 판단을 마친 기상호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미발견 형태의 게이트인가? 망해도 좀 많이 망한 것 같았다.

푸른색의 기둥이 도드라지는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숲. 곳곳에 흰색의 덩굴이 있는 게 괜히 이상한 세계 같아 소름이 돋았다. 기상호가 팔을 벅벅 긁었다. 오, 저기 농구선수의 손바닥만 한 벌레가 샤샤샤샥 기어 다니네. 기상호가 하늘로 고개를 올렸다. 브우우우우우우우. 도대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이 공기 중으로 울려 퍼졌다가 사라졌다. 저 멀리서 단말마가 들린 것 같은 착각도 함께였다.

답이 없다. 답이 없어도 이 정도로 없을 수가 없다. 미발견에 미등록 게이트인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친다. 공무원 헌터가 언제쯤 이 이상 현상을 눈치채고 기상호를 구하러 올 것인가. 최약체 9급이 과연 구조가 올 때까지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 문제는 차고 없을 정도로 넘쳤다. 대충 계산해도 생존확률은 5%밖에 안 되니 보통이라면 당면한 죽음을 걱정할 터였다.

“희차이, 인쟈 내 우야노…….”

그러나 기상호의 걱정은 다른 것이었다.

게이트에 휘말린 것 자체는 괜찮았다. 한두 번인가. 생존확률 5%? 상관없었다. 그는 그 5%를 100%로 늘려서라도 징그럽게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이곳에서 인간의 이지를 초월한 괴물을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까 봐 걱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가 제 죽음을 직감하는 이유는…….

―기상호, 이 씹새끼가 왜 출근을 안 해?

머릿속에 환청을 들려주는 상사 때문이었다. 이걸 상사라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준수가 길드장을 겸임하고 있으니 대충 상사라고 치지 뭐. 어쨌건 간에 성준수라면 게이트 싱크고 나발이고 무단결근을 한 기상호를 친히 조질 게 틀림없었다. 빨리 나가기라도 해야 상황을 조금이라도 무마시킬 텐데, 미발견 미등록 신규 게이트면 답도 없었다. 겁도 없이 싸돌아다녔다고 불호령만 더 높아지겠지. ‘야, 상호야. 너 진짜 제정신이냐? 월급 받아서 어디다 썼어. 내가 게이트 통신구 제대로 챙겨 다니라고 했지. 이번이 몇 번째야?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길드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 머릿속에서 성준수가 할 법한 말을 재생시킨 기상호가 키득키득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니라서 더욱 웃겼다.

각성자면 각성자답게 인벤토리 안에 생존 물품과 아이템을 넣어둘 것이지, 기상호는 인벤토리를 가방 대용으로 사용했다. 비상 연락망은 당연하고 생존에 필수적이라 여겨지는 무기와 아이템조차 없었다. 제대로 거시기됐다.

애초에 기상호는 직접 전선에 나설 일 없는 지휘 타입의 서포터다. 보통이라면 연락용 수단이라도 챙기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스킬로 연락을 대처했다. 덕분에 기상호의 인벤토리에는 간식과 담요 등 일상 물품만 한가득 있었다.

보다만 만화책은 왜 있는기고. 인벤토리에서 쓰레기를 몇 개 꺼내 게이트 안에 무단투기를 한 기상호가 고민했다. 어떡하지. 진짜 어떡하지. 게이트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꼬인 곳도 있을 정도니 고작 30분만 지났다고 해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렇게 30분의 추가 고민을 한 기상호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살아남고 생각하자! 혹시 모른다. 생존 난이도 S급에 어쩔 수 없이 휘말린 거니 조금은 봐줄지도. 실상 성준수는 기상호의 안위를 조금 살벌하게 걱정하는 것일 뿐이었지만 그는 저 좋을 대로 생각했다. 안 그래도 계륵이라고 구박받는데 이러다간 안전을 핑계로 길드 건물에 감금당하게 생겼다.

그리하여 기상호가 게이트 탐색에 나선 지 딱 23분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죽음을 직감했다.

저 앞에, 무언가 있다.

기상호의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 이는 본능이 울리는 경종이기도 했으며 시스템이 내보내는 경고기도 했다. [관찰안(ex)]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상하다. 분명 이 근처엔 뭐가 없었는데. 기상호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에 따라 그의 앞에 있는 무언가도 움직였다.

들켰다. 죽음을 목전에 둔 기상호가 재차 뒤로 빠졌다. 그러나 고작 9급으로 명명된 기상호보단 그의 앞에 있는 것이 빨랐다. 그대로 덜미가 붙잡혔다. 제발 살려주세요! 저 지방도 없어서 맛없을 거예요! 그가 필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는 말을 꾹 삼켰다. 생존 수칙 제 몇 번이더라. 큰 소리를 내서 몬스터를 자극하는 것은 금물일지니. 가까스로 생존 수칙을 지킨 기상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전신을 짓누르고 호흡을 압박하는 존재감이 거대했다.

이제 그는 곧 죽을 것이다. 기상호는 제 죽음을 직감했다.

……정말로 이렇게 죽는 건가?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기상호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고등급의 몬스터 대신 다른 존재가 서 있었다.

“……기상호?”

인간을 흉내 내는 몬스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것은 확실하게 인간이었다. 고작 셰이프시프터 따위로는 저 거대한 존재감을 흉내낼 수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최종수……?”

흉내 낸다면 기상호에게 익숙한 인간 흉내나 내지, 5년 전에 보고 만 사람을 흉내 낼 리는 없으니까.

기상호가 제 앞에 선 최종수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었다.

게이트 생존 수칙 제2번.

다른 생존자와 싸우지 마라. 의견이 통합되지 않는 순간 이는 곧장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최종수,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1급 헌터. 이명은 검은 태풍. 현재 대한민국에 1급 헌터가 얼마 없는 만큼 그의 이름은 드높았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 또한 떨어지지 않으니 최종수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 것은 당연한 사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이 최종수를 알았다. 기상호 역시 최종수를 알았다. 그렇다면 최종수는 왜 기상호를 알고 있나?

이를 따져보기 위해선 5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래, 아직 게이트라는 것이 나타나지 않았고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아가던 그 시절을 말이다.

당시의 기상호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꿈이 넘쳤다고 할 수는 없고, 희망이 가득 찼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나름대로 열정이 있는 아이였다. 뭐에 대한 열정? 그리 좋아해 마지않았던 농구에 대한 열정 말이다. 기상호는 농구를 하는 학생이었다. 좋아해서, 즐거워서라는 이유 하나로 이어 나가기엔 혹독한 입시였지만 그래도 기상호는 농구를 사랑했다. 비 오는 날 혼자 공을 튀기다 뒤통수가 깨지고도 농구를 계속했다. 비록 한때 농구가 재미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쓸모없다는 이유로 포기하려던 적이 있기야 했지만. 어쨌든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고 기적은 준비된 이들에게 찾아왔다.

수많은 조건이 겹쳐 이루어낸 쌍용기의 우승. 단 6명의 농구부원으로 이루어냈던 쾌거.

그때 기상호와 최종수는 코트 위에서 마주했다. 마주한 것뿐일까, 아예 전담 마크까지 했는데. 에이스와 에이스 스토퍼, 최종수와 기상호. 둘은 한 코트 위를 누볐고 끝내주는 경기를 했다. 그리하여 기상호는 농구를 그만두지 않았고 최종수는 미국행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간에 뭐를 많이 생략하자면 아무튼 그랬다.

최종수와 기상호는 언젠가는―, 으로 이어질 대치를 위해 각자의 코트 위에서 최선을 다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왜 아마도가 붙냐면, 이 글의 장르는 청춘 스포츠가 아니라 퓨전 판타지 게이트 물이니까. 로맨스와 코메디라는 태그도 붙일 수 있겠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고…….

어쨌든 둘은 안면이 있긴 했다. 그리고 그게 끝. 기상호는 그 뒤로 최종수를 잊고 잘만 살았다.

성준수와 진재유가 성공적으로 진학해 대학에 가고, 지상고에 새로운 신입이 들어오고 등등……. 평화롭게 흐를 것만 같은 시간이 무너진 것은 기상호가 고2가 되던 날이었다. 이현성이 오랜만에 만나서 놀자고 쌍용기의 멤버들을 불러 모았을 때.

게이트 브레이크, 혹은 싱크, 혹은 침식. 어느 날부터 생겨난 균열은 갑작스럽게 터지고 사람을 잡아먹었다. 그 끝에 도사리는 것은 끔찍한 종말이라 불러도 될 정도니, 기상호를 포함한 구 지상고 농구부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지금으로 치면 생존 난이도 D 정도의 어렵지 않은 게이트였다지만 당시엔 정말 정신이 없었다. 오래간만에 모여서 회포나 풀려고 했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 미디어에서나 나올법한 몬스터들은 기괴 그 자체였고 상황은 암담하기만 했다. 7명 전원이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 여겨도 될 정도로 말이다.

100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7명은 일심동체로 똘똘 뭉쳤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난데없이 각성해서 시스템이라는 정체불명의 홀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구 지상고 농구부 모임은 이현성을 제외한 6명이 전원 각성하는 데 성공했다.

‘와, 이거 파티랑 길드 등록 시스템도 있네요. 진짜 게임 같다.’

‘빙시야, 니는 지금 상황에 농담이 나오나?’

‘우리 이미 파티 아니었음?’

‘흠. 혜택은 길드 쪽이 더 높은데요? 오, 오픈 기념으로 길드 등록이 무료라는 걸 보니 원래는 유료인갑네. 길드 등록합니다?’

‘아, 거 할 거면 빨리빨리 좀 해라.’

‘햄들, 이거 길드 이름도 정해야 하나 본데요? 뭘로 할까요?’

‘농신 진재유와 바보들 어떰?’

‘마, 니 미쳤나!’

‘쫌 까리한 건 어떻데. 이규햄 쓰는 말들 같은 거…….’

‘내는 그런 거 싫다. 완전 오타쿠같다 안 카나.’

‘할 거면 빨리빨리 좀 몬하나.’

‘에잉, 일단 대충 지상최강이라고 등록합니다? 음음, 길드명은 나중에 바꾸면 되고……. 어라, 길드장이 나네?’

‘정희찬이 길드장이라니, 우리 길드는 망할라나부다…….’

‘니보단 내가 낫다. 권한 준수햄한테 넘길게요?’

‘아, 시바 왜 하필 난데? 감독님 계시잖아.’

‘감독님은 미각성이라서 등록이 안 되는데요?’

그렇게 지상최강은 얼렁뚱땅 길드로 등록되었다.

비록 이현성은 각성하지 못했지만 모두의 정신이 흔들릴 때마다 어른으로 다잡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다했다. 다들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살아 나간다면 뜨끈한 물에 몸부터 데우자. 맛있는 것도 왕창 먹고, 푹 쉰 다음 농구를 하자. 어떻게든 살아만 나간다면……. 무슨 재난 상황에서 생존물을 찍는 것처럼 지상최강은 처절하게 살아남았다. 각자의 특기를 살려 마침내 보스 몬스터를 물리치고 밖에 나왔더니, 이게 웬걸? 지구에 격변이 일어나셨단다.

격변이 일어난 지구에서 농구를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군인도 죽어 나가는 마당이다. 시스템이라는 미지의 힘을 사용하는 이들은 난세의 영웅이 되었다. 안정화가 이루어지는 2년 동안 지상최강은 국가의 부름 아래에 개같이 굴렀다. 농구선수라는 꿈도 자연히 멀어졌다. 사실 아니어도 농구는 못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런 게…….

‘아, 각성자…… 시라고요. 스테이터스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남들의 몇 배를 뛰어넘다 못해 고층 건물을 가볍게 뛰어오르는 탄력은 기본이요, 40분 동안 연석으로 달려도 지치기는커녕 아드레날린만 휘날리는 몸에, 주먹 한 방이면 철근을 우그러트리고 콘크리트 벽을 부수는데 농구는 무슨 농구. 초상 치를 일 있나. 그래도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빠르게 안정된 편이었다. 안정화가 된 이후 지상최강이 길드로 자리를 잡기란 어렵지 않았다. 참고로 길드 이름을 바꾸는 건 실패했다. 생각보다 많은 포인트를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길드 등록 값은 더했다. 해체하기엔 길드 혜택이 아까웠다. 생존을 위해 적당히 등록한 길드는 그대로 직장이 되고 말았다.

지상최강 소속의 9급 헌터 기상호. 애매한 스킬과 낮은 스테이터스 덕분에 이렇다 할 쓸모를 찾지도 못한 지휘형 서포터. 안정화가 다 된 마당에 너무 경각심을 가지고 살 필요는 없다고, 대충대충 출근하다 연락 수단 하나 챙기지 않았던 그는…….

5년 전 코트에서 만났던 인간 태풍, 현 1급 헌터 ‘검은 태풍’ 최종수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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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호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시네요, 혹시 저 기억……, 하시나요? 최종수는 답하지 않았다. 뭐 이런 멍청한 놈을 다 보냐는 표정……, 까지는 짓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기상호를 한심해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기상호가 쭈그러들었다.

‘무슨, 압박감이…….’

최종수의 눈치를 힐끔 살펴본 기상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었다. 상대방을 굳게 만드는 스킬을 패시브로 달고 있는 보스급 몬스터도 아니고, 뭐 인간이 이런 압박감을 발산한단 말인가. 심지어 최종수는 의식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려 드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진정한 기상호가 찬찬히 최종수를 탐색했다. 가라앉은 청회색 눈이 짧게 기상호에게 머물렀다.

고작 5년이다. 고작 5년. 강산이 변하기도 힘든 시간인데……. 그 사이 종종 맛 간 눈을 하던 최종수는 한층 더 맛탱이가 가 있었다. 이게 가능한가? 기상호라고 최종수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살아 움직이는 재해도 아닌 주제에 최종수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짓누르는 존재감을 가졌다. 이게 각광받는 1급 헌터라니, 최종수의 팬들은 눈이 삔 게 틀림없었다.

기상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최종수가 저를 죽일 확률과 살아남을 방법. 그와 동행하는 쪽이 생존에 더 유리한가, 아니면 불리한가. 순식간에 수집된 수백 가지의 정보가 다시 갈래를 뻗어 최선의 결론을 내렸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총 1초. 스캔을 끝마친 기상호가 냅다 외쳤다.

“저, 괜찮으시다면 동행하실래요?”

“내가 왜.”

“살려 주세요. 살고 싶어요.”

내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는데……. 다은햄이랑 다음 달에 열리는 그렌x간 행사도 가야하고 새로 개봉하는 영화도 봐야 한다. 희차이랑 같이 킹 그레이트 베리초코 말랑퐁실 푸딩도 먹기로 했고! 못 본 완결도 많다! 기상호가 비굴하게 진심을 뇌까렸다. 맛대가리가 간 최종수 앞에서는 말을 꾸며내도 소용없을 것이다. 오로지 진심, 100%의 진심만이 그에게 통할 터이니…….

간절한 기상호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최종수가 한층 더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최종수의 기세는 여전히 무시무시했으나 기상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1단계 통과. 살아남아야 할 구구절절한 사연과 어필을 할 때가 왔다. 기상호는 어쩌다 자기가 이 게이트에 휘말렸으며 여기가 얼마나 생존하기 힘든지, 자기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구구절절 읊었다. 데려가면 쓸모도 있을 거예요. 자기 어필은 덤이었다.

최종수는 이를 가만히 듣다가 미간을 설풋 찡그렸다.

“9급?”

그걸 어디다 써, 하는 눈이다. 하기야, 9급 헌터는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다는 말까지 있으니 쓸모없어 보일만도 했다. 아니, 근데 나도 9급이고 싶어서 9급인 건 아닌데……. 기상호가 무해 한 표정으로 억울함을 피력했다.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눈이었다. 감정을 호소하는 공략의 쓸모없음을 깨달은 기상호가 표정을 싹 바꿨다. 최종수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저, 9급이긴 한데 꽤 쓸모가 있을 거예요. 다른 스탯보다 민첩이 높아서 어지간한 공격은 알아서 잘 피할 자신도 있고…….”

“그러면 혼자 살아남으면 되잖아.”

“아이, 참. 아무리 그래도 9급이랑 1급이 어떻게 같겠습니까? 그리고 이 게이트에 지금 형이랑 내 말고 다른 사람도 없어요. 아까 정보 확인해 봤을 때…….”

“…….”

아차, 말실수했다. 기상호가 서둘러 입을 닫았다. 코트 위에서 다양한 감정 변화를 보였던 최종수는 5년이 지난 지금 포 페이스를 유지했다. 찌푸린 채로, 그 이상의 감정 표출은 무가치하다는 듯이. 뭘 겪었기에 저리도 표정이 사라졌단 말인가. 기상호가 눈치를 보며 다시 최종수를 살폈다. 그의 상태 이상에는 여전히 [인간 혐오][인간 불신],[결벽증]등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제 상태가 이상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최종수가 낮게 그르렁거렸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게…….”

저 지경으로 디버프를 달고 있는 이상 뭘 꾸며내 말하든 소용없다. 심지어 1급 헌터라면 어지간한 거짓말은 직감으로 눈치챌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은 기상호가 제 비밀 중 극히 일부를 말했다.

“제 스킬 셋이 정보를 읽어내는 데 특화되어서요……. 그래서 시스템으로 보는 정보도 좀 많고, 음. 독감별이나 몬스터 약점 같은 것도 잘 캐내요. 근데 스탯이 쪼매, 아니 많이 낮아가꼬 9급인 거라……. 공격 스킬도 없고…….”

사실 개구라다. 스킬은 일부러 허위신고 했다. 스탯은 처음 검사 이후로 갱신을 안 했고. 애당초 기상호의 스킬셋은 괴이하다 할 정도로 이상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서포터 주제에 실질적으로 줄 수 있는 버프는 없는 수준이고, 온갖 정보는 읽어내는데 스탯은 쓰레기. 1급 위험종의 약점을 잘만 읽어내고도 공격하나 제대로 못 해서 9급 위험종도 겨우겨우 잡으니 이게 9급이 아니면 뭐겠는가. 심지어 기상호를 이루는 핵심 스킬인 [관찰안(Ex)]은 패시브다. 온오프가 가능한 액티브면 참 좋을 텐데 이게 패시브니 온갖 디메리트가 따라붙어 결국은 계륵 행. ‘네 스킬 다른데 들키면 이상한 일에 동원될 테니, 되도록 넌 철저하게 스킬을 숨겨라.’ 하는 길드원들의 말을 착실히 따라 대부분의 정보를 숨긴 신비주의 기상호가 방긋 웃었다. 최종수의 미간에는 여전히 주름이 져 있었다.

약 3초간의 아이컨텍이 이어졌다. 최종수는 기상호를 보다 별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의 생존 수칙에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역시 1급은 1급이었다. 기상호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잽싸게 최종수 옆으로 따라붙었다. 비록 잘못 건드리면 터지는 지뢰인 것은 매한가지나 조심만 하면 확실한 생존을 보장하는 1급을 마주한 것은 참 운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기상호와 최종수가 동행을 시작한 지 삼 일이 지났다.

그동안 별별 일이 다 있었다. 무릇 인간이란 하지 말라고 하면 더더욱 호기심이 돋는 생물인 법. 기상호는 게이트 내의 온갖 생물을 건드렸다. ‘처음 보는 식물종인데.’ 하며 보라색 줄기를 건드렸다가 촉수에 잡혀 거꾸로 들리기는 기본이요, 함정이랑 함정은 전부 건드리고 다니니 최종수로서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기어코 최종수가 한마디를 하자 기상호는 베실베실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잇, 햄 없었으면 내도 안 건드렸죠. 덕분에 무사했습니다. 감삼다.”

저게 감사 인사를 하는 건지, 앞으로 더 건드리겠다고 통보를 하는 건지……. 어쨌건 기상호는 기가 막히게 선을 긋고 딱 호기심을 충족시킬 정도로만 게이트를 활보했다.

와중에 그러한 기상호의 기행은 의외로 생존에 도움이 됐다. 별 볼 일 없는 뱀 몬스터를 잡아 죽였더니 어마어마한 맹독을 가지고 있더라. 이 정도는 둬도 안 뒤진다고 했더니 기상호는 언젠가 저를 잡아서 거꾸로 뒤집었던 보라색 촉수 줄기를 꺼내 빻았다. 그 즙 위에 몇몇 재료를 더해 이상한 죽을 만들더니 그것을 그대로 최종수의 상처 위에 치덕치덕 발랐다. 불쾌하다고 뭐라 할 틈도 없이 이루어진 행동에 통증이 가셨다. 기상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방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 기상호 특제 야매 연금술! 해독제입니다. 아마 당분간 같은 독에 당해도 괜찮을 거예요.”

그러면서 정작 본인에게 연금술 스킬이 없다느니, 연금술 스킬만 있어도 대성했을 거라고 떠드는 게 웃기기 짝이 없었다. 미친 거 아냐? 연금술 스킬도 없이 이딴 짓을? 최종수가 황당해하면 그는 뻔뻔한 얼굴로 응수했다. 마력만 못 담을 뿐이지 정확한 재료를 사용하면 효과엔 문제가 없다고 말이다. 반박하고 싶어도 실제로 그러했기에 최종수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사람과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최종수가 보는 정말이지 기상호는 그야말로 기상천외 자체인 인간이었다. 이는 비단 그만의 평이 아닐 것이다. 9급이라고 무시하려 치면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정보를 주워오고 공격은 혼자서 잘도 피한다. 그렇다고 데리고 다니기 좋은 파티원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피하기만 잘 피하지 공격력은 전무 할뿐더러 혼자 두기엔 또 불안했다. 이건 독 없어서 먹을 수 있어요. 대신 좀 익혀야 할 듯? 어딜 봐도 독극물 같은 버섯을 따서 흥얼거리며 불에 굽는데 정말로 독 내성 스킬이 없어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최종수의 의문만 늘 정도였다. 넌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아 오는 건데? 꼬박 하루 동안 다물려있던 최종수의 입이 열리고야 말았다. 기상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예전에 갇혔을 때 구분하는 법을 익혔다고 했다.

자칭 계륵답게 기상호는 정말로 계륵다웠다. 서포터면 버프나 디버프 스킬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럴 때마다 기상호는 하하 웃으며 농담조로 이런 말이나 했다. 마나가 너무 없어서 쓸 수 있는 스킬이 없다고. 최종수는 기상호의 말 중 몇 퍼센트가 진심인지 가늠하다 그만두었다. 그중 몇 개의 거짓이 섞여 있든 간에 게이트를 나가면 두 사람이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아무튼 그런 기상호가 있는 덕분에 식량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기상호의 인벤토리에는 아이템 대신 간식이 한가득 있었고 왜인지 모를 조미료도 있었다. 딱딱하고 마른 보존식량 대신 소금을 쳐 구워 먹은 버섯은 쫄깃하고 맛있었다. 생존 난이도 S급의 게이트는 전투 능력 최상위의 1급 헌터와 온갖 잡지식을 알고 있는 9급 헌터 덕분에 캠핑장이 되고 말았다.

이쯤이면 위기의식이 너무 없는가 하는 의심을 가질 때가 됐다. 기상호는 밤이 되면 늘어지게 쿨쿨 잠만 잤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최종수와는 영 딴판인 모습이었다. 얘는 내가 무섭지도 않은가. 자기를 안 해칠 거란 확신이라도 있나? 최종수가 침까지 흘려가며 자는 기상호를 보며 잠깐 고민했다. 주인이 옆에 있다고 경계심 하나 없이 잠만 자는 강아지도 아니고. 상태 이상 때문에 여즉 기상호를 믿지 못하는 최종수가 심란해했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말해 뭐겠는가. 기상호는 진짜 계륵이었다. 있으면 편하고 좋은데 딱히 필수일 정도는 아니고, 뭘 해도 애매하기만 한 정도. 최종수는 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상호를 성실히 챙겼다. 신기하게도 기상호는 괜찮았다.

마치 기상호는 최종수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선을 넘지 않았다.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은 기본이고, 쉴 새 없이 떠들어 최종수의 정신을 빼놓다가도 기가 막히게 그의 기분이 가라앉는 시점에서 입을 닫았다. 나가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로.

그러한 상황이 며칠이나 이어지고 난 뒤에야 두 사람은 중간 보스와 마주했다. 상반신은 여자의 형상을 하고 하반신은 뱀처럼 길게 이어진 몬스터였다. 발성을 할 수 있는 기관은 없는지 내내 쉭쉭 소리만 내는 게 어지간히 기괴했다. 최종수가 전투 자세를 취하고 앞으로 나서자 기상호가 뒤로 빠졌다. 햄, 화이팅! 전투에서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되니 인질이라도 안 되게 빼는 건가. 최종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을 느낀 게 근 몇 년만 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최종수의 주력은 염력과 근접 전투다. 여태까지 나왔던 몬스터는 별 볼 일 없는 잡몹이었기에 염력 계열의 스킬만 사용했다. 네임드급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했다.

중력장에 따라 땅이 사물을 잡아먹을 듯 짓누른다. 몬스터가 키에엑 비명을 질렀다. 그것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사이 최종수가 튀어 나갔다. 검은 태풍이라는 이명답게 그의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휘몰아쳤다. 한 번의 주먹질에 몬스터는 그야말로 폭탄처럼 터져나갔다. 쾅, 쾅. 굉음이 연달아 울리며 땅이 흔들렸다. 녹색의 체액이 이곳저곳으로 튀었다. 뒤로 빠져서 구경하던 기상호의 표정이 굳었다.

“잠깐, 종수햄. 뒤로 빠져요!”

그가 재빠르게 외쳤으나 그보단 최종수가 당하는 속도가 빨랐다. 터져버린 껍데기를 허물처럼 벗어버린 뱀이 한층 작아진 크기로 최종수를 휘감았다. 물리 방어력이 조금만 낮았어도 최종수는 슬리퍼를 맞은 모기처럼 터져 죽었을 것이다. 염력이 뱀의 똬리를 열었다. 곧이어 굉음이 울리며 땅이 움푹 패었다. 검은 연기가 공기를 따라 일렁이고 바람이 휘몰아쳤다.

“큭…….”

연기 사이로 검은 인영이 비척거렸다. 최종수가 입에 고인 피를 퉷, 하고 뱉어냈다. 흙구름이 일었다. 햄, 뒤에! 기상호가 재차 외쳤다. 최종수가 몸을 뺄 시간도 없이 거대한 뱀의 아가리가 연기 사이로 쩌억 입을 벌리며 나타났다. 옷을 찢어발기는 이빨이 최종수의 팔을 무자비하게 씹었다. 이거 상반신은 인간 아니었어? 의문을 가질 틈은 없었다. 뒤쪽에서 허물을 벗은 뱀이 한 마리 더 나타났다.

“아, 씨 미친…….”

기상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순식간에 뱀이 두 마리가 되었다. 애초에 두 개체는 하나다. 벗겨진 허물이 뱀의 형상을 띄고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생존 난이도 S급이 괜히 S급이 아닐 텐데 강하다고 불러온 방심의 결과가 이거다. 기상호가 이를 씹었다.

[스킬, 쉐도우 링크(S)를 사용합니다.]

[적용 대상: 프쉬케(S)]

[주의! 대상이 연결을 거부합니다!]

[스킬을 해제하지 않을 시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연달아 시스템 창이 떠올랐지만 기상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킬을 강행했다. 그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나왔다. 붉은색 시스템 창이 시끄럽게 경고를 날렸지만 기상호는 멈추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종수햄!”

“왜.”

“이거 멈추는 거 잠깐밖에 못 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저 믿죠?”

“뭘?”

“믿는다고 믿을게요!”

[스킬, 쉐도우 링크(S)를 사용합니다.]

[적용 대상: 검은 태풍]

몬스터에게로 향했던 스킬이 그대로 최종수에게 이어졌다. 다짜고짜 믿냐며 하는 짓거리가 이딴 거라니. 자동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거부감에 최종수가 인상을 썼다. 기상호의 코로부터 흘러나오는 피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이제 아예 입으로 뭉친 피를 뱉고 있었다. 머릿속에 이명이 웅웅 울리는 상태에서 최종수는 기상호를 거부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바르작거리는 몬스터의 움직임이 점차 정돈되고 있다. 최종수는 기상호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그를 믿기로 했다.

[연결에 성공했습니다. 스킬 효과에 따라 감각이 확장되고 정보의 전달이 용이해집니다.]

무슨 스킬을 행했는지 설명을 들을 틈은 없었다. 파티 창과 별개로 기상호의 정보가 최종수에게 떠올랐다. 그렇지만 속 편히 읽을 시간은 없었다. 기상호가 읽어냈던 정보가 최종수에게 전달된다. 이는 단순히 텔레파시 같은 언어의 전달이 아니었다. 인지와 감각의 확장, 생각한 것에 대한 확신. 저 뱀을 때려잡기 위해서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을 공략해야 할지, 또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실시간으로 정보가 최종수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잠깐의 어지러움 이후로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최종수가 뱀으로부터 한 발 멀어졌다.

저것은 죽을 때마다 증식하는 개체다. 심지어 단순한 증식도 아니었다. 뱀 허물을 모두 벗을 때까지 죽지 않으며 벗은 허물은 그대로 몬스터가 될 것이다. 동시에 무식했던 움직임은 더 정교해질 것이고 교활한 공격을 해오겠지. 최종수가 타겟을 정확히 잡아 염력을 퍼부었다. 평소보다 조준이 편한 느낌이 뒤따랐다. 벗겨진 허물이 그대로 객사한다. 허물을 벗은 개체는 정신을 차린 듯 땅속을 파고들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상호를 노린다. 최종수의 생각보다도 훨씬 빠른 전달이 이루어졌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과연, 지휘형 서포터라는 건 이런 거구나. 최종수로부터 뻗어져 나간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는 그림자에서 검을 뽑아 그대로 도약했다. 1초. 뱀이 기상호에게 닿기까지 고작해야 1초가 걸릴 것이다. 생각하고 판단하면 늦는다. 새카만 검신이 땅에 처박혔다. 땅이 울렸다. 최종수는 그대로 땅을 중력장으로 눌렀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총 2초. 일반인보다 조금 좋은 신체조건을 가진 기상호는 고작해야 몇 걸음 더 뒤로 빠졌을 뿐이다. 중력과 염동력, 그리고 연달아 떨어진 검을 견디지 못한 뱀이 비명을 지르며 땅 밖으로 튀어나왔다. 두 번째 허물은 그대로 땅에 박혀 죽었는지 더 작아진 뱀의 본체 하나만이 쉿쉿 소리를 냈다. 뱀이 튀어나온 구멍에서 고작 5m 떨어진 기상호가 엄지를 들어 올렸다. 일명 따봉이었다.

“나이스 타이밍! 햄 아녔으면 내 한번 죽었겠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미친놈…….”

“어허. 아직 안 끝났으니까 집중이나 해요.”

“하…….”

한참 코피도 흘려대고 입에서 피도 토한 놈치고는 멀쩡하다. 최종수가 짜증스럽게 손을 뻗었다. 실체화를 가지고 일렁이는 그림자에서 대검을 뽑아낸 최종수가 자신보다 작아진 뱀을 보았다. 여전히 상반신은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는 게 어지간히 기분 나쁜 게 아니었다.

이후 전투는 조금 더 수월했다. 기상호가 정말이지 계륵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몬스터는 계속해서 기상호를 노렸고 기상호는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이를 피했다. 이를 지키는 몫은 당연히 최종수에게 주어졌다. 마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사고와 판단이 연달아 이어졌지만 이를 따라 전투를 이으니 피해가 최소화되었다. 평소 스타일대로 무식하게 전투했다면 최종수는 부상을 입었을 것이고 기상호는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허물을 처리하고 반쯤 녹은 인간 형상의 비늘 덩어리를 찍어 누르자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1급 위험종이 이렇게 쉽게 잡힐 리 없는데. 최종수가 심란하게 손바닥을 보자 기상호가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스킬을 끄기라도 한 것인지 확장되었던 인지가 그대로 사라졌다.

여전히 머쓱한 표정을 지은 기상호가 뭐라뭐라 떠들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저희 둘 정도면 보스몹도 잡을 수 있을 듯? 아무렇게나 떠드는 모습이 퍽 애절했다. 최종수는 기상호가 어떠한 대화로부터 회피하고자 함을 눈치챘으나 맞춰주지는 않았다.

“야.”

“네, 넵?”

“방금 거 뭐야.”

“네에? 뭘 말씀하시는 걸까……?”

“몬스터 멈춘 거, 어떻게 한 거냐고.”

최종수의 안광이 시퍼렇게 빛났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동공이 평소보다 미친놈 같아 보일 정도다. 기상호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마치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은 위압감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해버리겠다는 양…….

“너 디버프 스킬 없다고 했잖아.”

최종수는 기상호가 못 알아들었을까 친히 한 번 더 질문을 해주었다. 귓구멍이 막힌 게 아니라 살기에 짓눌린 게 문제지만……. 어지간한 공포 저항 스킬이 없었다면 7급까지도 꼼작 못할 아우라였다. 다행히 기상호는 공포 저항이 있었다.

“그거느은……, 디버프가 아니라. 그, 뭐시랄까…….”

“나한테 쓴 거랑 놈한테 쓴 거, 같은 거 맞지?”

확실히 최종수는 맛대가리가 갔다. 대답을 잘못한다면 그는 이 자리에서 기상호를 묻어버리고 ‘게이트에 휘말려서 죽었나 보네요.’따위의 말을 할 것이다. 소멸시키면 그대로 사라지는 게이트의 특성상 증거인멸도 필요 없을 테니. 생사를 함께 넘나들었다 싶더니만 와 도와준 사람에게 승질이고. 기상호가 식은땀을 흘리며 진실을 이실직고했다.

“……넵, 제 주력 스킬 중 하나입니다. 감각을 연결하는 스킬……, 인데 이게 진짜로 감각이 연결되는 건 아니고요.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수월하게 전달하는? 뭐 그런 스킬이고……, 서로에게 거부감이 클수록 페널티가 커지는데요……. 이걸 역이용하면 몬스터에게 잠깐? 타격을 줄 수 있는 거라서요. 네넵. 저한테도 타격이 와서 자주 사용하진 않지만 응용하면 잠깐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거든요…….”

“…….”

최종수는 기상호의 구질구질한 설명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삐딱하게 서 있기만 했다. 스킬창을 읽으면 될 것을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기상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수상했다. 희차이, 미안타. 내 약속은 못 지키겠다……. 다은햄도 미안타. 빌려 간 만화 못 돌려 주것네……. 기상호가 토혈할 때도 안 흘리던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다. 죽이는 당사자에게 유언을 전달해달라고 하면 해주나. 기상호가 가족과 지상최강에게 유언 좀 전달해달라고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최종수의 기세가 한껏 누그러들었다.

“제한은 있나?”

“넹?”

“사용하는데 다른 페널티나 제한 같은 게 있냐고.”

“……어, 정확히 뭘 물어보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외에는 크게 없어요. 한 번 연결해두면 마나 소모도 적은 편이라…….”

기상호는 물어보지 않은 정보도 추가로 주절거렸다. 여러 명에게 동시에 걸 수도 있고, 거리가 멀어지면 자동으로 끊기고 등등. 최종수는 무표정하게 기상호의 말이 끊기길 기다리다 한마디 던졌다.

“다시 걸어.”

“넵?”

“나갈 때까지 유지하라고, 그거.”

“……엄, 그래도 될까요?”

기상호가 소심하게 되묻자 최종수가 뭐가 문제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에 기상호가 쪼그라들었다. 왜 기상호가 이런 반응을 보이나, 그것은 기상호의 스킬에 있었다. 이는 단순히 그의 실력이나 능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쉐도우 링크. 직역하면 대충 그림자 연결쯤 될까. 이 스킬은 기상호의 주력 중 하나였으며 쓰기 참 애매모호한 스킬이기도 했다. 사고의 확장, 인지의 광범위화. 쓸데없이 언어로 의지를 전달해야 하는 여타 스킬과 달리 곧장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효용에 반해 서로 간의 신뢰가 없으면 도루묵이 되는 스킬이란 말이다. 그거뿐이었다면 좋겠지만 생각과 인지의 영역에 직접적으로 침투하는 스킬인지라 기상호를 좋아하는 사람도 쉐도우 링크는 싫어하곤 했다. 머릿속을 휘젓고 직접 정보를 때려 박는 느낌이라 기분 나쁘다나 뭐라나. 어쩌겠어, 그런 스킬인 걸.

지상최강의 길드원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은 불쾌함과 거부감을 갖는 스킬인데 최종수는 쭉 유지하라고 한다. 된다면 나갈 때까지.

눈치를 보던 기상호가 다시 최종수에게 스킬을 사용했다. 기상호를 토혈하게까지 만든 당사자치고 최종수는 꽤 부드럽게 연결을 받아들였다. 최종수의 상태 이상에서 [정신 착란]과 [인식 저해]가 약해졌다. 아항, 이거 때문이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저 정도로 디버프를 줄줄 단 상태라면 몇 개만 약해져도 살만할 것이다.

적당히 판단을 마친 기상호가 일어났다. 햄, 저 배고픈데 일단 뭐라도 먹죠? 최종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인벤토리에서 회복 물약을 꺼냈다. 니는 니 꼴을 보고도 처먹자는 말이 나오냐? 위장에서 피를 뱉은 놈이 위장에다 음식물을 쑤셔 넣는 행위는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기상호가 입맛을 쩝 다셨다. 이제 괜찮은데.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기에는 최종수가 무서워서 대신 맛없는 물약이나 꿀꺽꿀꺽 삼켰다.

하급 체력 회복 물약은 정말이지 쓰고, 비리고, 시고, 맛없었다.

게이트 생존 수칙 제3번.

미확인 종을 발견했을 경우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아라.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미지의 게이트는 밟지 않아도 터지는 지뢰밭과 다름없다.

최종수와 기상호가 미발견 미등록 게이트에 휘말린 지 일주일이 되었다. 그동안 기상호는 연결을 해제하지 않았다. 덕분일까, 둘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이는 비단 기상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최종수는 기상호에게 자신을 맡기고 쪽잠을 잘 정도로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기상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달려와 구해주고, 그의 기행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보야말로 생존에 있어 가장 필요할 것일지니, 기상호는 여전히 기막히게 선을 맞춰 온갖 정보를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정보는 곧장 연결로 인해 최종수에게 넘어갔다. 몬스터를 잡고, 함정을 파훼하고. 연약한 9급의 몸뚱이로 해낼 수 없는 것은 최종수가 대신했다. 각각 머리와 몸을 담당하니 둘만으로도 합이 참 완벽하더라. 최종수는 착실히 지휘형 서포터가 알려주는 대로 공략을 이어 나갔다. 기상호의 공략은 완벽했다. 본인의 연약한 몸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나대지 좀 마, 기상호…….”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거 햄도 알잖아요.”

“나대지 말라고.”

“넵.”

친해졌다고 해도 최종수는 여전히 일정 이상의 선을 그어뒀다. 인간 불신과 인간 혐오가 저렇게 상태 이상에서 반짝거리는데 받아들이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였다. 기상호는 저 좋을 대로 생각했고 최종수는 이렇게까지 믿어주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못내 괴로워했다. 표정으로 티 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사람이 참 저렇게 정이 많아서 어떡한담. 기상호는 정말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괜찮았으니까.

문제는 두 번째 중간 보스를 잡을 때 일어났다. 상반신은 인간 여자의 형상을 하고 하반신은 거미의 모습을 한 괴물. 한국 등록법상 1급 위험종으로 분류되며 시스템은 S급 몬스터라 지칭하는 그놈. 그것은 자폭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 죽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막타를 맞을 때 폭발하는 스타일이다. 정말 귀찮은 몹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기상호는 자폭을 진작 읽었다. 읽었고 최종수에게 전달했다. 움직임에서부터 공략, 거미줄을 조심하라는 것 하나하나까지 전부 지휘해서 몹을 때려잡았다.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게 하나가 있다면 최종수는 1급 헌터 치고 디버프를 줄줄 달고 있어 종종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몬스터의 자폭이 생각보다 강렬했단 점일까. 이 정도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다. 놀란 기상호는 뛰어들어 최종수를 자폭 범위에서 끌어내려 했다. 이에 더더욱 놀란 최종수는 기상호가 다치지 않게 감쌌다. 미친놈아, 나는 방어력 높아서 안 죽는다고!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최종수는 정신을 잃기 전에 기상호에게 한마디 하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여겼다.

참고로 기상호는 이것도 읽었다. 당황해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고 말하기 전에 최종수가 기절했을 뿐이지.

아무리 방어력이 높다고 하나 이 정도면 치명상이다. 회복 물약이라도 쏟아서 부어버릴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아쉽게도 기상호의 인벤토리엔 먹을 것만 있었다. 남의 인벤토리를 마음대로 뒤적거릴 수도 없으니 최종수는 꼼짝없이 치명상을 유지하게 생겼다. 우선 장소라도 이동하자. 기상호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최종수의 질질 부축했다.

게이트 생존 수칙 제4번.

게이트에 있는 것을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마라.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는 과일조차 맹독일 수 있다.

최종수의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빠지기만 했다. 옷을 벗기고, 등에 박힌 정체 모를 조각들을 빼내고 최대한 처치를 하면서도 기상호는 깨어난 최종수가 화를 낼까 잠깐 걱정했다. 최근엔 조금 괜찮아진 티가 났지만 여전히 최종수는 온갖 디버프를 달고 있었으니 화를 낼만도 했다. 그렇다고 죽게 둘 수도 없고…….

새파랗게 질린 안색이 안쓰럽다. 최종수의 HP는 회복되기는커녕 점점 악화됐다. 날이 저물면 추위 때문에 더 위험할 터. 기상호는 이 근방이 안전하단 사실을 확인했으나 방심을 놓지 않았다. 최하급 체력 회복 물약이라도 챙기고 다닐걸. 후회가 뒤늦었다.

기상호가 고심했다. 이대로 최종수가 잘못될 확률은 몇이나 되려나. 아무리 최종수가 무섭다고 해도 저를 감싸다 이렇게 된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비기의 스킬, 제3번을 꺼내기로 했다.

기상호가 계륵 취급받는 이유, 그 세 번째. 서포터면서 똥 같은 효율을 자랑하는 버프기. 일명 생명력 넘겨주기!

기상호라고 버프 스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이 개미 눈곱만큼밖에 없어 효율이 개같이 떨어질 뿐. 마력이 없으면 뭐다? 체력으로 대체한다. 체력도 없다면? 생명력으로 대체한다. 여기서 생명력은 수명보다는 좀 더 기상호를 이루는 본질에 가까웠다. 감정, 기억, 생각, 등등. 스킬을 사용할수록 기상호는 기억도 잃고 감정도 잃는다. 잃은 감정은 추후 회복되기는 하겠지만 기억은 회복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여타 Mp를 사용하는 스킬에 비해 효과가 떨어지기까지 한다. 이런 개떡같은 스킬을 어디다 써? 여기서 썼다. 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스킬을 시전 하기 위해선 접촉까지 해야 했다.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 일일이 손잡고 회복시킬 수도 없으니 기상호가 이 스킬을 사용한 횟수는 손가락에 꼽을 수도 있었다.

기상호가 최종수의 손을 잡았다. 최종수가 짧게 움츠러들었다. 기절한 주제에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무시무시하다. 그 정도로 누군가와 닿는 게 싫은가. 기상호가 인상을 쓰며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쉐도우 싱크(C)를 사용합니다.]

[적용 대상: 검은 태풍]

스킬을 시전 하자 시스템 창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이어 두통이 몰려왔다. 기상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스템을 다루는 존재가 뭐일진 모르겠지만 스킬명 참 대충 지었다는 감상도 뒤따랐다. 기상호는 쓸데없는 잡생각을 넣어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세간에서는 시스템의 편의로만 제공되는 스킬만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응용하며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기상호는 후자였다. [쉐도우 싱크(C)]는 단순한 버프기가 아니다. 상대와 자신의 존재를 연결하고 나눠주는 행위. 말 그대로 자신을 넘겨 버프를 주는 스킬. 이전까지만 해도 기상호는 이 스킬을 적당히 Hp를 까서 상대방에게 주는 정도로만 사용했다. 그게 모자라면 기억 정도? 당연하게도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숨겨진 특전 발견!]

[쉐도우 링크(S)와 쉐도우 싱크(C)가 공명합니다.]

[새로운 스킬, 프네우마 링크(A)이 발동합니다.]

이게 뭐고, 하고 당황할 새도 없었다. 기상호는 강제로 최종수의 기억을 엿봐야만 했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기억을 말이다.

기상호는 똑똑하다. 각성한 이후로는 원하지도 않는 지능까지 지녀야만 했다. 하여 그는 어째서 최종수가 어째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예측했었다. 단지 확신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타인의 과거에 깊게 연관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를 연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무자비한 시스템은 언제나 그렇듯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기상호에게 때려 박았다.

최종수의 인간 불신은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나가 Ncaa를 뛰던 최종수 역시 격변의 시대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각성했고 수많은 시민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동시에 붙잡혔다. 원하지 않는 것들을 강제로 겪어야만 했다.

최종수는 농구를 할 수 없게 된 와중 사람들의 비틀린 기대를 업어야만 했다. 각성자의 한계를 알아보고 늘리고자 하는 실험이 자행되었다. 세계가 멸망해가는 상황에 도의가 다 뭐란 말인가. 심지어 최종수는 자국민도 아니었다. 써먹다 버리기 딱 좋은 패. 그것이 최종수였다.

그는 영웅이라는 호칭을 강제로 업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 끔찍한 고통의 시간을 견뎠다.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최종수를 탓했다. 약해서 지키지 못했다고, 그것이 죄라고 재차 약물을 투입했다. 최종수는 한계까지 주입받은 약물에 정신이 허공에 붕 뜬 상태로 괴물을 터트려야만 했다. 빌어먹도록 튼튼해진 몸뚱아리는 그가 쉽게 자신을 놓게 허락하지도 않았다.

최종수가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폭주해서 최악의 몬스터처럼 사살당하거나,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인형이 되거나. 완전히 미쳐버리지 못한 정신은 애매하게 미쳐 온갖 디버프을 달게 되었다. 안정화가 이루어지고 국가 간의 교류가 가능해졌을 무렵에도 미국은 최종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게나 강한 각성자를 놓치면 그게 바보다. 몇 번의 요청에도 무응답이 돌아오자 한국은 그대로 최종수를 포기했다.

끝까지 그를 돌려달라고 요청한 이들은 최종수의 부모님뿐이었다. 제발 아들을 돌려달라고, 안 된다면 얼굴만이라도 한 번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울었다. 최종수의 어머니는 거의 실신할 정도로 괴로워했고 끝내 각성했다. 아들을 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소환 적성에 맞춰 각성하고 아들을 돌려받았다. 이를 돌려받았다고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 돌아와도 그의 정신적 이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명이 울리고 착시가 일어났다. 그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했다.

그나마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부모님 정도. 그럼에도 최종수는 멀쩡한 척을 했다. 어머니가 걱정한단 이유 하나로, 가족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그렇게 최종수는 1급 헌터가 되었다. 인간과 몬스터를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헌터로 활동했다. 홀로 활동하면 그럭저럭 할 만했다. 죽여야 할 것과 죽이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구분도 나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가 정상이 아님을 알았다. 하여 제 행동을 제한했다. 어느 날 미쳐버려서 대량 학살 같은 것을 저지르지 않도록, 적어도 부모님이 슬퍼하는 일은 만들지 말자고 말이다.

최종수가 숨긴 치부를 엿본 기상호가 탄식을 내뱉었다.

“왐마야…….”

생각보다 엄청난데? 이 정도면 동행을 허락한 게 기적이다. 아니, 기상호가 기상호임을 알아본 것 자체가 엄청나다고 볼 수 있다. 어쩐지 꼴이 말이 아니더라.

외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 불신] [인간 혐오] [결벽증] [정신 착란] [착시] [환청] [인식 저해] [회복 감소] [환상통] [비탄] [분노(비활성)] 등……. 세자면 끝도 없는 상태 이상을 줄줄이 이어졌다. 이거 살아있는 사람 맞나? 뭐, 걸어 다니는 좀비 같은 거 아냐? 기상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인지 최종수의 상태 이상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그에게 찾아왔다. 아니, 이건 기분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정보를 조합하고 빠르게 결론을 추론한 기상호가 미묘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연결이 약하다. 단순히 손을 잡는 것만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 접촉 면적을 늘리기 위해 포옹까지 해봤지만, 아직 약했다. 기상호의 마음속으로 엄청난 갈등이 일어났다. 이 이상은 좀……. 그러면 그의 마음속에서 다른 기상호가 타박했다. 지금 저 지경으로 상태 이상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너 하나 구하겠다고 이래 다쳤는데 무시할 거냐고. 기상호가 다시 고민했다. 그래도 첫 키스를 갖다 바치는 건 좀…….

최종수가 앓는 소리를 냈다. 기상호가 결론을 내렸다. 인공호흡은 구명 활동이지 키스가 아닌데 이것도 그렇다 치지 뭐. 기상호가 스킬 정보를 확인했다.

[대상자와의 접촉이 긴밀할수록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영향이 커집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기상호가 최종수에게 냅다 입술을 갖다 박았다.

핏줄이 터져 축축하고 물컹한 입술이 맞닿았다. 기절한 채로 구명활동에 키스를 바치게 된 최종수가 이를 세웠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냐고요. 기상호가 짜증을 삼키며 각도를 휘었다. 이러다 숨넘어가지는 않겠지. 소소한 걱정이 덤처럼 따라왔다.

과연, 긴밀한 연결은 이게 맞았다. 최종수가 마음속에 더욱 묻어두었던 것들이 기상호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알 바는 아니었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금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었으니까.

‘찾았다.’

기상호가 최종수의 상태 이상에 다가갔다. 이 중에서 [회복 감소]만 빼내도 그는 제법 멀쩡해질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애초에 회복 감소는 다른 정신 문제에 딸린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잠시간 고민한 기상호가 그대로 최종수의 상태 이상을 제 쪽으로 옮겼다. 가능할까 싶었는데 정말로 됐다. 콕콕 쑤시듯 박히는 두통이 기상호의 머릿속을 새롭게 휘저었다. 뒤섞인 상태 이상이 기상호의 호흡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갓 생긴 따끈한 스킬의 효과를 제대로 알아내려면 이것저것 더 시도해봐야 할 텐데……. 그러나 그 끝은 암전이었다. 기상호는 기절했다.

게이트 생존 수칙 제5번.

무슨 일이 있어도 방심하지 말아라. 게이트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설령 안전해 보이는 장소를 확보했더라도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 방심은 당신을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

기상호가 훔쳐본 대로 최종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인간을 제 편으로 여기지 못하고 끔찍한 무언가라 여기는 시점에서 이미 글렀다. 그는 제게 이상이 생겼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선을 넘지만 않으면 멀쩡한 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그나마도 주기적으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최종수는 홀로 미등록 게이트에 들어와 몬스터를 청소했다.

……그랬는데.

기상호만은 달랐다. 무어가 달랐다고 형용하기조차 어려웠지만 아무튼 달랐다. 확실하게 인간으로 보이는 존재는 가족을 제외하고 기상호가 처음이었다. 최종수는 사실 기상호가 비굴하게 뇌까리지 않더라도 동행할 생각이 있었다. 되도록 인간으로 보이는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이는 최종수가 기상호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냐는 별개의 영역이다. 최종수는 여전히 인간이 싫었고 그럼에도 기상호가 살았으면 했다. 하여 멍청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 어차피 그거 하나 맞는다고 죽지는 않으니 조금 앓다 깨어나면 될 노릇이다. 무력해진 자신을 가족도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불안감을 떠올리긴 이미 늦었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무렵, 옆에는 끙끙 앓는 기상호가 있었다. 최종수가 그에게 손을 뻗다가 굳었다. 머리를 울리는 두통도, 지긋지긋한 환청도 없다. 지나칠 정도로 개운한 감각이 오히려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최종수가 기상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나름 잘 자다가 난데없이 멱살이 잡힌 기상호가 눈을 굴렸다.

“너, 나한테 무슨 짓 했어.”

“예에……?”

“무슨 짓 했냐고, 이 새끼야!”

태풍처럼 돌아가는 동공에 살기가 감돌았다. 기상호가 신음을 삼켰다. 아직 회복이 덜 된 터라 머리가 웅웅 울렸다. 최종수는 무식하게 잡은 멱살을 내리눌렀다. 호흡이 막혔다. 기상호가 켈록거렸다. 근력 스탯도 높은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무식하게 누르면 어떡하냐고. 기상호가 몇 번 더 숨 막힘을 호소하고 나서야 최종수가 손을 놨다. 여전히 그의 표정은 험악했으나 특유의 위압감은 오히려 줄어 있었다. 몇 번 제 목을 문지르며 상태를 확인하던 기상호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대체, 와 이러시는 건데요…….”

“내가 할 말이야. 너 나한테 무슨 짓 했냐고.”

“……무슨 짓을 했냐고 물으셔도.”

입술을 좀 부빈 거 외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어 기상호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를 다른 뜻으로 알아들은 최종수에게서 험악한 기세가 다시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위압감에 짓눌린 기상호가 몇 번의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종수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기상호를 노려보기만 했다.

“우씨,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내 햄 지키려고 여서 며칠 동안 개고생했는지 아냐고요.”

“난 너한테 지켜달라고 한 적 없어.”

“저도 감싸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안 그랬으면 넌 거기서 뒤졌어.”

“……지는.”

그동안 고분고분했던 기상호가 갑자기 최종수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인간 혐오에 이은 몇몇 디버프가 확실하게 제거된 것을 확인한 기상호가 더욱더 나댔다.

“아니, 솔직히 이거 햄이 내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 아니었으면 진작 뒈졌을 거라고요. 사람이 무슨 상태 이상을 그렇게 무식하게 달고 있는지……. 태성햄이 뭐 잘못 건드렸다가 저주 줄줄 달았을 때도 그 지경은 아니었는데, 진짜. 씨, 기껏 디버프 다 해결해줬더니 고맙단 말은 못 할망정…….”

“……제거했다고? 어떻게?”

“네?”

“이거, 어떻게 없앴냐고. 아니, 그 전에 알고 있었어?”

“모르는 쪽이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렇게 살기를 풀풀 흘리고 있는데…….”

기상호가 몇 번 더 제 상태를 점검하는 동안 최종수가 짜증스럽게 이마를 쓸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별짓을 해도 안 없어지던 문제다. 항 정신성 약물은 고사하고 정신계나 정화계 효과가 담긴 아이템으로도 소용없었다. 그런데 고작 9급이 어떻게 이걸 해결할 수 있겠는가. 최종수의 눈으로 다시 살기가 감돌았다. 기상호가 움츠러들었다. 인간 혐오를 달고 있을 때 자체적으로 풍기는 위압감과 달리 이것은 직접적으로 제게 날아드는 살기였던지라 조금 무서웠다. 물론 공포 저항 스킬이 있어서 조금만 무서웠다.

짧게 기상호를 노려보던 최종수가 드디어 생각을 정리한 듯 통보했다.

“야, 니가 숨기고 있는 거 전부 털어놔.”

“네엡?”

“그딴 연기 안 통하니까 털어놓으라고. 너 9급 아니지?”

“……스탯 갱신을 안 하긴 했는데요…….”

“골라. 지금 이 자리에서 뒤지던지, 숨기는 걸 전부 토해내던지.”

인간 불신을 제거한 최종수는 표정이 다양했다. 그리고 말도 많았다. 기상호가 슬그머니 그를 보다 눈을 깔았다. 최종수는 기상호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만은 명확했다. 그렇지만…….

“셋 샐 때까지 안 털면 뒤진다.”

죽도록 팬 다음 회복 물약을 부어서 치료하는 악독한 짓거리는 할 수 있겠지. 기상호가 눈물을 머금고 진실을 털어놓았다.

“이, 입을 좀 맞추긴 했지만 그건 정당한 구명 활동이었습니다……!!”

“……뭐?”

“진짜, 진짜로요. 그거 외엔 안 했다고요. 손도 조금 잡긴 했는데…….”

“허어…….”

숨기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하니 입술 박치기 한 거나 이실직고하고 있다. 최종수가 이마를 짚었다. 이 골때리는 놈을 어떻게 구슬려야 하지. 한숨이 짙어졌다. 이에 눈치를 본 기상호가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면 대화만 빙빙 돌 뿐이다. 최종수가 북풍과 태양으로 타협을 시도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고 협박으로 기상호를 눌러봐야 나올 정보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화 안 낼 테니까 그냥 전부 얘기 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나오시겠다?”

기상호는 가능하다면 저에 대한 것을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신비주의의 지휘 스페셜리스트, 그게 바로 저 기상호죠. 지상최강이 괜히 기상호의 정보를 숨기려 한 게 아니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기상호의 스킬셋은 대규모 전투에선 무쓸모였지만 다른 곳에선 아주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상호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프네우마 링크(A)이 발동 중입니다.]

[대상자와의 접촉이 긴밀할수록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영향이 커집니다.]

그것은 스킬의 해제가 아직 덜 되었다는 것과, 프네우마 링크는 쌍방형 스킬이었다는 것이다.

최종수가 놓았던 기상호의 멱살을 다시 잡아 올렸다. 기상호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혹시나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온 행동이었으나 이는 곧 이어진 최종수의 행동으로 인해 이는 로맨틱한 상황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입에 닿는 이 축축하고 말랑한 것은 뭐고……. 최상위 지능 스탯을 가진 기상호로도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없었다.

축축하고 미끄덩한 혀가 입술 위에 닿았다. 입 안 열어? 말로 하지 않았음에도 온갖 연결이 된 탓에 최종수의 의지가 그대로 기상호에게 전달되었다. 아니, 제발 쫌. 기상호가 무력하게 울었다. 일전에 있었던 행위는 구명 활동이라는 변명이라도 붙지 이건 빼박 키스였다. 것도 혀 넣어서 하는 찐한 키스.

[프네우마 이메진(A)에 따라 대상자에게 강화 효과를 전달합니다.]

[서로 간의 신뢰가 높지 않습니다! 효과가 반감됩니다.]

[검은 태풍(S)의 스탯 일부가 무형 지휘자(-)에게 전달됩니다.]

[무형 지휘자(-)의 체력이 +18 상승합니다.]

[무형 지휘자(-)의 근력이 +23 상승합니다.]

[무형 지휘자(-)의 민첩이…….]

[강화 효과는 약 1시간 동안 유지됩니다.]

연달아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동시에 기상호는 제 내부가 헤집어지는 불쾌한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아, 이게 쉐도우 링크에 연결된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이구나 하고 깨달을 틈은 없었다. 어느새 입을 떼어낸 최종수가 비릿하게 웃었다.

“허……. 이거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네?”

냅다 남의 첫 키스를 강탈해간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아마도.

기상호가 긴장했다. 지금부터 최종수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서 였다. 그런 기상호를 보며 최종수가 가소롭다는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너 무슨 만화인가 보고서 그거 따라 한다고…….”

“으아아으아아으아아아아아악!!!!”

최종수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기상호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입을 막았다. 기상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최종수는 잠시간 가늘게 뜬 눈으로 기상호를 보다 냉큼 그 손바닥을 핥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혓바닥의 감촉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자 기상호는 아예 괴상한 소리를 내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럽게 상승한 스탯에 적응을 못 한 터라 움직임이 어색했다. 뭐고, 내 와이라노. 남의 입에서 튀어나올 흑역사를 막다 졸지에 뒤통수가 깨지게 생긴 기상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 그는 넘어지지 않았다. 대신하여 어쩐지 로맨틱한 자세~로 최종수에게 받쳐졌다.

“그건 대체 어떻게 아신…….”

“아니면 더 말해줘? 너 중학생 때 처음으로 야한 거 보고…….”

“흐아아아아아악!!!!”

기상호가 다시 손바닥으로 최종수의 입을 막았다. 얼굴만이 아니라 목까지 새빨갛게 물든 것이 어지간히 당황스러운 티가 났다. 아니면 창피해서 죽고 싶거나. 어느 쪽이든 최종수는 원하는 정보를 아직 듣지 못한 상태다. 여기서 더 털어봐야 기상호는 자신에 대해 뱉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어떻게 하면 이 스킬을 해제할 수 있을지 허둥지둥하는 게 빤히 보였다.

[프네우마 링크]는 1:1로 대상을 등록하는 방식의 스킬이기 때문에 타 스킬처럼 곧장 해제할 수 없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기상호를 가늠하던 최종수가 제 입을 막던 손을 당겨 기상호를 끌어들였다. 강화 효과로 인하여 스탯이 상승했다고는 하나 최종수에 비하면 여전히 새 발의 피였던 지라 반항은 소용없었다. 또 뭘 하려고! 기상호가 기겁하든 말든 최종수는 힘으로 그를 잡아 고정하고 다시 입을 맞췄다.

[프네우마 이메진(A)에 따라 대상자에게 강화 효과를 전달합니다.]

[서로 간의 신뢰가 높지 않습니다! 효과가 반감됩니다.]

[검은 태풍(S)의 스탯 일부가 무형 지휘자(-)에게 전달됩니다.]

[강화 효과의 유지 시간이 2시간으로 늘어납니다.]

시스템 창이 다시 강화 효과에 대한 정보를 읊었다. 서로 간의 스탯을 나누는 버프기인가. 최종수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키스를 하는 사이 숨이 모자라진 기상호가 그의 가슴을 퍽퍽 쳐댔다. 코로 숨을 쉬면 된다는 것도 모르고 버둥거리는 꼴이 조금 웃겼다. 최종수가 슬쩍 고개를 뒤로 뺐다. 겨우 숨을 되찾은 기상호가 씩씩거렸다.

“이렇게 가, 갑자기 남사스러운 행동을 하는 건 전국 키스 협회에서……!!”

“뭐래.”

어차피 이번은 잠시 숨 고를 틈만 준 것이다. 고작 입을 맞추는 행위 따위로는 의식의 깊은 곳까지 침투할 수 없지만 간단한 것들은 알 수 있을 터. 몇 초의 숨 고를 틈만 주고 다시 붙어오는 최종수의 얼굴에 기상호의 머리가 뒤엉켰다.

최종수는 정말이지 무자비한 첫키스 강탈범이었다. 머리로 몰린 열이 채 식기도 전에 이어진 행위에 열기가 이상하게 모였다. 진짜 와 이라시는 건데요……. 억울함을 항변할 틈도 없었다. 심지어 최종수는 농밀하게 입을 맞추다 못해 몸 사이에 틈이 없도록 기상호를 꽉 껴안고 다리 사이를 꾹 눌러 자극까지 했다. 긴밀한 접촉인지 뭔지로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면 키스 이상의 행위까지 할 기세다.

상태 이상은 진작 제거했는데 최종수는 여전히 미친놈이었다. 잘생긴 미친놈. 망할 키스 때문에 자꾸 정신이 흐려져 대상 해제도 못 한 기상호가 포기하듯 선언했다.

“아, 알려 드릴게요. 말할 테니까 그만 좀!!”

그제야 최종수가 만족했단 표정으로 기상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손바닥으로 입술을 슥 훑는 게 치명적이기 짝이 없다. 모자란 숨을 고르며 한참 헉헉거리던 기상호가 이마를 짚었다. 한꺼번에 들어온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최종수는 성격이 참 급했다.

“셋.”

“아, 말한다고요! 쫌!”

“둘.”

“제발…….”

“……하나.”

재차 최종수의 얼굴이 다가오기 전에 기상호가 후다닥 물러서며 제한을 풀었다. 그리고 최종수의 코로부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치 생각에 노이즈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흔들리고 머리가 울렸다.

기상호가 제한을 푼 것은 고작 1초였다. 단 1초.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이 1초만으로도 뇌가 녹아 죽을 것이다.

과도한 정보량으로 인해 뇌가 녹을 것 같은 두통이 찾아왔다. 1초의 지옥을 맛보고 1분 동안 굳어있던 최종수가 허억, 하며 숨을 토해냈다. 시야가 핑그르 돌았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호흡을 다 고른 최종수가 고개를 들자 기상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그의 생각을 포함한 상태 전반을 읽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평범하게 보이는 기상호가 혀를 차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이제 됐어요?”

“방금, 그거 뭐야…….”

“참나, 알려줘도 계속 물어보네.”

“……방금 그거, 뭐냐고.”

“겪어봤으니까 알 거 아녜요?”

뾰로통하게 부풀어 오른뺨이 살짝 상기되어 있다. 그러나 최종수는 이 순간 기상호라는 존재 자체를 인간 외의 무언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기상호의 말마따나 최종수는 겪었고, 알았다. 그래서 기상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것만 같은 전지함, 그러나 동시에 아는 모든 것들에 의해 짓눌리는 감각. 단지 보는 것만으로 스탯은 물론이거니와 상태가 어떤지, 상대방의 기분과 이후 어떤 행동을 할지까지 알 수 있는 괴이쩍은 상태. 그뿐만이었다면 이토록 숨이 막히지 않을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폭력적인 정보로 다가왔다. 기이하게 생긴 숲의 구조, 저것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무슨 효과가 있는지. 기어 다니는 벌레가 어떠한 종으로 나뉘며 어떤 처치를 할 때 무슨 효과가 있을지까지가 순식간에 머릿속에 때려 박혔다. 차라리 약물을 한계까지 주입받는 게 덜 역할 정도의 고통도 뒤따랐다.

최종수는 방금의 1초가 [쉐도우 링크]로 인해 파생한 효과임을 알았다. 아니지, 스킬 두 개가 합쳐진 [프네우마 링크]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입을 맞추면서 어느 정도 짐작하기는 했다. 전투할 때마다 겪어봤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가 생각했다. 평범한 헌터가 받아들이는 정보의 수백 배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다고? 온오프를 할 수 있는 액티브가 아닌 건가? 그러면 기상호는 평소에도 저 상태로 돌아다니는 건가?

이는 1급 헌터인 최종수로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저건 인간이 아니었다.

“와, 그 눈은 쫌 상처…….”

“씹, 너 지금 내 생각 읽었냐?”

“아니, 보이는 걸 우케요. 햄 지금 내 괴물이라고 생각했죠.”

“…….”

“근데 내 보기엔 햄이 더 이상하거든요? 사람이 무슨 상태 이상을 그렇게 달아놓고 살아 있냐…….”

“……야.”

“아무튼 이걸로 끝! 저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 맙시다. 우리 각각 비밀 하나씩 주고받은 걸로 넘기자고요. 오케이?”

대체 저 꼴로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 최종수는 기상호를 미친놈 보듯 보았고 기상호 역시 최종수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았다. 타인이 본다면 둘 다 비슷하겠으나 어쨌든 둘은 서로를 괴물처럼 여겼다.

여기서 짚고 갈 점은 수없이 많았으나 기상호는 덮기를 원했다. 최종수는 잠시간 고민했다. 저런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게 들킨다면 도의를 져버린 일에 동원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또한 기상호라는 사람은 더이상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대해질 것이다. 그것은 최종수가 이미 한 차례 겪어왔으며 방금 저도 모르게 행한 행동이기도 했다.

하여 최종수는 적당히 기상호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숨기고 싶다면 이쯤에서 넘어가는 게 맞겠지. 상황이 어떻게 꼬였든 둘은 함께 생존 난이도 S급이라는 게이트를 헤쳐 나가야 하는 운명 공동체다. 분열을 일으켜봐야 좋을 건 없었다. 비록 이 순간에도 그의 존재는 0.01초 단위로 기상호에게 해부되고 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며 납득하던 최종수에게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야.”

“네넵.”

“근데 너, 내 상태 이상 어떻게 해결했냐?”

“여기서 이걸 묻는다고요?”

“그건 말 안 했잖아. 너도 알잖아? 어지간해선 해결 안 됐던 거.”

“하긴.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한 건 쫌 너무했어요. 어케 그런 꼴로 살아 있대…….”

“야, 니는……!!”

“네넵, 방금 건 제가 실언했습니다. 죄송하고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아무튼 지금 햄이 궁금한 건 디버프를 어떻게 제거했냐, 잖아요.”

“…….”

“저한테 옮겼어요.”

“……뭐?”

“내한테 옮겼다고요. 없앤 게 아니라 옮긴 거니까 해결돼도 그렇게 신기할 건 없죠?”

“…….”

최종수의 얼굴 위로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가 떠올랐다. 읽지 않아도 빤히 보이는 감정이었다. 기상호의 빈정이 상했다. 상해도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기상호가 최종수를 신기해한 것은 그런 상태 이상을 줄줄이 달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본인에게 그 상태 이상을 옮겨놨다고 하고 있다. 안 이상할 리 없었다.

둘의 시선이 잠시간 마주했다. 최종수는 이제 기상호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눈으로 제 의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존재가 해부당한다는 사실에 께름칙 해한 것 치고는 빠른 태도 변화였다. 제게 머무르던 시선을 마주 보던 기상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방금 내 상태 봤잖아요. 어지간한 정신 계열의 상태 이상은 며칠 있으면 사라져요.”

“……허.”

기상호는 자랑스럽게 ‘웬만해선 정신계 공격도 안 통함요.’를 덧붙이고 어깨를 으쓱였다. 최종수가 머리를 짚었다. 고맙긴 한데 께름칙하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기도 좀 뭐하고. 호감이 없냐 하면 그건 아닌데 동병상련과 거부감이 동시에 온다. 이걸 어떡한담……. 그가 고민하고 있으니 기상호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근데 내 아직 회복이 좀 덜 돼서……. 며칠만 쉬면 안 되까요?”

“하…….”

“누구씨가 잘 자던 사람을 깨워서 멱살을 잡는 바람에 그렇게 됐네요.”

“그걸 내 탓을 하시겠다?”

“사실이잖아요. 기껏 상태 이상도 흡수해가며 고쳐줬더니 깨자마자 화나 내고…….”

“…….”

사실이 맞긴 했다. 최종수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단 10일 만에 전세가 역전된 채로 이어지게 되었다.

게이트 생존 수칙 제6번.

소리를 내지 말고 흔적도 남기지 말아라. 불을 피울 수 있다 하더라도 피워선 안 된다. 명심하라.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은 언제 죽음이 닥쳐올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다.

며칠간의 휴식이 이어졌다. 최종수는 간간이 덤벼드는 몬스터를 정리하며 주변 환경을 쾌적하게 만들었고 기상호는 회복에 전념했다. 아무리 두면 회복한다 해도 1급 헌터 마저 인사불성으로 만든 상태 이상이다. 앓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최종수는 기상호를 꺼리면서도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다. 최상급 회복 물약을 권하기도 했다. 기상호는 이를 거절했다. 어차피 두면 저절로 회복될 것이고 굳이 빚을 만들고 싶지 않다가 이유였는데, 그러면 최종수는 ‘니가 나한테 억지로 지운 빚이 더 대단하다.’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기상호는 저를 동행시켜 생존률을 높여준 게 더 대단하다고 우겼고 최종수는 코웃음을 치는 나날이 이어졌다. 둘은 서로를 은인이자 괴물쯤으로 여겼다.

기상호의 상태가 전부 회복되고 나서 곧장 한 행동은 스킬의 상세 능력 확인이었다. 기상호는 최종수를 꺼리며 대상 등록을 해제하고 싶은 티를 냈으나 최종수가 이를 막았다. 거절할 수도 없는 게 프네우마 링크의 효과가 정말 기막히게 좋았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 이 말을 형상화한 것처럼 프네우마 링크는 서로에게 자신의 능력치를 나눠줄 수 있는 스킬이었다. 나눠준다고 하여 본인의 스탯이 줄어들거나 하진 않았다. 그야말로 1급인 최종수와 함께 쓴다면 개사기라 불릴 스킬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손잡는 거랑 포옹으로는 상승률이 낮네요?”

“그냥 포기하고 입이나 대시지?”

“싫어요. 외간 남자에게 줄 입술은 없습니다.”

“나는 뭐 좋은 줄 아냐?”

“옙, 그러니까 저희 서로 적당히 선 좀 두죠?”

“시발, 너 이리 안 와?”

오로지 접촉을 통해서만 버프를 줄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

기상호는 질색하며 입술 내주기를 꺼렸다. 최종수는 역정을 냈다. 나돌아다니긴 해도 고분고분하게 굴던 녀석이 갑자기 머리끝까지 기어 올라와 춤을 추는 게 여간 같잖았다. 저 자식, 이제 내가 자길 안 죽일 거라고 확신해서 저러는 거지? 최종수의 분노가 하늘을 뚫을 기세로 넘실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상호는 도망가기 바빴다. 기본 능력치 차이로 인해 금방 붙잡혔지만.

“그러게 줄 때 얌전히 받지?”

“……햄 같으면 내를 괴물로 보는 사람이랑 입술 부비고 싶겠어요?”

“너 지킨답시고 신경 쓰는 것보단 나아.”

“우씨…….”

둘 중 누구에게도 달갑지 않은 접촉이 이어졌다. 그래도 수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몇 번 더 입을 맞추고 나니 얼추 나눠줄 수 있는 버프의 범위, 유지 시간을 알게 되었다.

손잡기나 포옹으로도 어느 정도 상승효과가 있지만 최종수는 굳이 구강 점막 접촉을 고집했다. 그래야 제일 덜 귀찮다나 뭐라나. 사실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종수도 예측했고 기상호도 알았으나 둘 중 그 누구도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키스로는 30%까지 전달되는 거 같은데 섹…….”

“아악! 형은 부끄러움도 없어요!?”

“아, 씨. 또 뭐가 문제야?”

아니다. 최종수는 별생각 없이 말했다. 섹,으로 시작하는 그 행위를 할 경우 줄 수 있는 버프의 총량은 어떻게 되는가. 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둘 다 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최종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거, 니 스킬이잖아. 나가면 쓰긴 해야 할 텐데?”

“말 안 할 건데요. 귀찮아질 거 같아가…….”

최종수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지란 표정으로 기상호를 봤다. 그는 기상호가 제 생각을 반쯤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표정을 아예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덕분에 상처만 받은 기상호가 울상을 지었다.

“아니, 햄 같으면 쓰고 싶겠어요?! 효율도 개똥이구만!”

“니 좇밥같은 스탯 상태 보면 쓰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누누이 말하지만 저도 상처라는 걸 받습니다.”

“어쩌라고.”

이건 정말 19살 최종수의 재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상태 이상.ver 최종수가 더 나았다. 기상호가 짜증을 삼키며 눈앞의 몬스터를 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강해진 기분은 좋았다.

최종수는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기상호에게 이런저런 아이템을 넘겼다. 9급 헌터의 월급으로는 1년 동안 개같이 굴러도 못 살 최상급 포션을 받아든 기상호가 괜히 호들갑을 떨었다. 이걸 진짜 받아도 되는 건가요? 최종수는 쿨했다. 그냥 가져. 나가면 팔던가. 기상호는 사양하지 않았다. 자기가 마시는 건 싫으며 챙기는 건 또 좋단다. 심지어 한술 더 떠 무기도 빌렸다. 너는 헌터라는 놈이 무기도 없고 템도 없고 뭐 하는 거냐, 대체? 햄, 저는 지휘형 서포터에요. 전선에 나설 일 자체가 없었다고요. 서로를 께름칙하게 여기는 것 치고는 참 친근한 대화였다.

최종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딱 하나, 기상호를 괴물 취급하는 것만은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거부감은 본능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아예 없앨 수는 없었다. 기상호는 이것이 최종수 나름의 배려라는 사실을 알았다. 신경 써주는 것은 고맙긴 했다. 괴물 취급은 좀 서러웠지만.

그리하여 총 기상호와 최종수가 난데없이 미등록 게이트에 휘말린 지 총 보름이 되던 때.

“오. 어쩐지 찾아도 막보스가 안 보인다 했더니 여기 있었나 보네요.”

“……헛소리 할 거면 생략하고 정보나 읊어라.”

“햄, 좀 저를 자동 검색도구? 뭐 그런 걸로 여기시는 거 같은데…….”

“시끄럽고 보이는 거나 말해.”

“……인스터스 던전이에요. 내부는 미궁 형식으로, 한 번 길을 잃으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구조로 되어있는데 미궁이 살아있어서 실시간으로 움직이네요. 미궁 내부의 강도는 그리 높지 않아서 햄 정도면 주먹으로 부술 수 있을 거예요. 정석 공략법은 따로 있는 모양인데, 수복되기 전에 부숴서 직진하는 방법까진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미궁 자체에서 환상 공격을 할 가능성도 있네요. 정신계 공격인데 저항에 실패하면…….”

“요점만 말해.”

“저희가 따로 떨어지게 되면 좇된다고요.”

“그래?”

둘은 드디어 게이트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마지막 난관 앞에 섰다.

정석 공략대로라면 이전에 잡은 뱀과 거미에게서 나온 부산물을 이용하여 미궁을 돌파해야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거미줄은 착실히 파밍 해뒀지만 뱀은 지나치게 빠른 토벌로 독을 얻지 못했다. 정석 공략을 가늠해보던 기상호가 대뜸 다가온 최종수의 얼굴에 뒷걸음질을 쳤다. 최종수의 얼굴로 불만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야.”

“……마지막인데 안 하면 안 돼요?”

“어, 입술 대.”

“씨이…….”

기상호의 한숨을 끝으로 부드럽고 말랑한 입술이 겹쳤다. 서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수시로 입을 맞출 필요가 있나. 한탄이 뒤따랐으나 농밀하게 이어지는 키스로 인하여 쓸데없는 생각은 금방 줄줄이 녹아내렸다.

서로에게 버프를 주기 위한 감정 없는 키스가 몇 번이고 겹쳐 이어졌다. 입 사이로 실선이 생기려 하면 최종수는 곧장 다시 호흡을 삼키려 들었다. 1분에 강화 효과 유지 시간은 1시간. 최대 8시간까지. 대충 구색만 맞추는 척 입술만 맞대고 있어도 될 텐데 최종수는 매번 성실하게 혀를 집어넣었다. 키스를 해본 적이 있어야 이게 못 하는 건지 잘하는 건지 알기라도 할 텐데. 기상호가 답답함에 최종수의 가슴을 퍽퍽 쳤다. 물리 방어력이 얼마나 무식하게 높으면 치는 주먹만 아팠다. 눈이라도 감아주면 참 좋겠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시선 너머의 감정을 감지한 기상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온전히 최종수가 기상호를 꺼리고 괴물로만 여겼다면 이 키스가 그렇게까지 불쾌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던 최종수의 치부를 강제로 훑어보고 그를 동정하게 되는 일만 없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기상호는 부디 제 심장 박동이 최종수에게 들리지 않길 바라며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이제 마지막 공략을 할 시간이다.

게이트 생존 수칙 제7번.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게 하나가 있는데, 자신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짓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당신은 다르지 않다. 설령 운이 좋아 기적처럼 각성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대다수는 죽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각성을 기대하지 마라. 기적을 바라는 것보다 지금 준비된 것들로 최대한의 살길을 모색하는 것이 좋다.

삐이이―. 거슬리는 기계음이 귓전을 때렸다. 아니, 이걸 과연 거슬린다고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불쾌한 감각 사이로 희미한 말소리가 마치 오래된 티비처럼 스며들었다.

“……아직은 징후가…….”

“……를 더 투여하면…….”

“……그보다는 ……를…….”

마치 꿈속을 부유하는 것만 같은 몽롱한 감각이 이어졌다. 여긴 어디지. 나는 무얼 하고 있었더라. 자신이 하는 생각이 생각인지도 채 인지하지 못하고 최종수는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터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끔찍한 악취가 뒤섞였다. 비명과 단말마가 저 멀리서 울렸다. 아니, 멀리서 울렸던가? 코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몸의 절반이 갈린 무언가 살고 싶어 울부짖었다. 괴물이 기괴한 소리를 내질렀다. 깔려죽은 생명들은 하나같이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가 튀었다. 진물이 바닥을 오염시킨다. 역겨운 살점을 베어내자 또다시 위험이 나타났다. 죽는다. 죽인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왜? 여기는 어디지. 내가 무얼 하고 있었더라? 저건 뭐지? 끄러워, 이상해.해, 짜증 나,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정신이 흐트러졌다. 아니 애초부터 정신이라 부를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흐트러졌다고 표현함은 옳지 않을 것이다. 살점을 베는 감각이 지독했다. 들려오는 소리가 괴물의 울부짖음인지 사람의 비명인지 분간할 수 없다. 수없는 괴생명체를 쓰러트리며 최종수가 생각했다.

아, 저것들은 언제쯤 전부 사라질까?

“살려줘, 제발 날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불길이 번졌다. 괴물들은 뜨거운 온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했다.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법한 외형을 한 그것들은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서 인간을 포식했다. 단순히 포식만 했다면 이 기억이 이토록 끔찍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리라. 때때로 지능을 가진 개체는 부러 인간을 가지고 놀았다. 단지 심심해서, 보인다는 이유로 어린아이가 개미를 가지고 놀듯 사람들을 죽였다.

총화기가 통하지 않는 괴물들 앞에서 인간은 이처럼 무력했다. 감히 생태계의 정점에 섰다는 자부심은 한없이 나약해 무너지기만 반복했다.

살고 싶은 이들이 기도했다. 신이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걸까. 몇몇 인간은 맨몸으로 괴물에게 대항할 힘을 얻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

“당신은 영웅이야!”

“영웅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

하여 그들은 감히 영웅이라 불렸다. ……그런데 영웅이 뭐였지?

노이즈가 낀 것처럼 들려 오는 소리가 엉망으로 흔들렸다. 나는 누구였더라. 여기는 어디지? 드디어 무언가를 인지한 최종수가 생각했다. 인세에 강림한 지옥이 펼쳐진 가운데, 그는 단지 존재했다.

‘와, 역시 최종수. 오가멈점 폼 어디 안 갔는데요?’

‘오가멈점이 뭔데.’

‘헐, 햄 이거 몰라요? 오른쪽으로 가다가 멈춰서 점프슛. 막아봐!’

깨질듯한 두통이 찾아오면서 이상한 영상이 재생되었다. 조금은 부스스해 보이는 갈색의 머리카락, 무표정을 지으면 쎄한 인상이나 늘 해맑게 웃고 있어 그의 무표정이 어떤지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이. 그런 사람이 최종수 앞에서 웃고 까불었다. 마치 당신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더 까불어봐. 진짜 뒤진다.’

‘죽일 수 있었음 진작 죽였을 거면서?’

‘니는 잠시라도 주둥이를 가만히 못 내버려 두는 병이라도 있냐?’

‘헐. 어케 알았음요?’

‘……진짜?’

‘그런 병이 진짜 있겠어요? 보기보다 순진하네, 이 햄.’

그의 외관은 평범해 보이기만 해서, 언뜻 보면 지켜줘야 할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조차도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음은 매한가지일 텐데, 어째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범하게 구는 것인지.

근데 그게 누구더라?

최종수가 가만히 생각나는 발음을 입 안에서 굴렸다. 모래를 머금은 듯 껄끄러운 감각이 불쾌하게 스쳤다. 기억이 날 것만도 같은데. 기상호. 재차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생각나는 것은 여전히 없었다. 오히려 역함이 더욱 강해졌다. 기상호가 누구더라. 그런 애가 있었나?

의식이 잠긴 것처럼 흐려진다. 그와 함께 두통이 거세졌다. 뇌를 직접 꺼내 망치질을 하는 것만 같은 불쾌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흐트러지다 선명해지길 반복하는 시야에 무엇이 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통각이 망가졌다. 아픈 것인지 짜릿한 것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감각이 붕 떴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부상이 재생되었다. 어딘가 망가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미 망가졌나? 아파야 하는데 아프지 않고, 괴로워야 하는데 괴롭지 않고. 흐릿한 의식으로 말소리조차 제대로 못 알아듣는데 움직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적을 섬멸하면…….

다시 무언가 혈관을 타고 흘렀다. 치사량의 수 백배는 진작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몸뚱이를 과연 뭐라고 해야 할까. 피부를 뚫는 바늘의 감촉이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흐리기만 했다. 최종수는 눈앞에 떠오른 [약물중독(A)]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약, 쓰면 안 되는데…….’

그러면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그토록 원했던 코트 위에서 뛸 기회를 잃고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것이다. 아, 그러니까……. 그래. 농구. 농구를 더 이상 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

마침내 떠오른 명제에 최종수가 생각했다. 그래, 나는 농구를 하고 있었지. 견문을 더 넓히기 위해 미국의 대학으로 진학했고……. 그가 자신에 대해 떠올리자마자 다시 전기가 통한 것 같은 찌릿한 감각이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무너진 사회에 문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으로 이룩해냈던 도덕과 선은 흔적도 없이 부스러졌다.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쓰고 있는데 어째서 저들은 죽어야 마땅한 이들로 분류된단 말인가. 저것이 하는 말이 과연 사람의 말이 맞나? 애초에 저들이 인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가 조잡하게 크레파스를 덧그린 것만 같은 까만 무언가 사람 위로 덧씌워졌다.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끔찍한 필터가 덧씌워진 것마냥 노이즈가 섞여 들렸다.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으며 괴물은 섬멸해야 하는 존재였다. 마침내 문명이 재건되고 사람이 권리를 되찾아가는 동안에도, 최종수는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렀다.

[상태 이상, [정신 착란]이 재발합니다.]

[상태 이상, [착시]가 재발합니다.]

[상태 이상, [인식 저해]가 재발합니다.]

[상태 이상…….]

마치 수면에 잠기듯, 붕 뜨는 감각 사이로 푸른 창이 떠올랐다. 끝없이 떠오르는 창은 명료한 문장을 띄우고 있었으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했다.

[빠른 시간 내로 [상태 이상]을 처치하지 않을 시 모든 상태 이상이 [영구]로 고정됩니다.]

곧이어 찾아온 것은 불면 중 잦아드는 수마처럼 달콤했으니, 어쩌면 최종수가 이에 저항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게이트 생존 수칙 제8번

혹시라도, 당신이 만약 미지의 괴물에게 맞서기로 결심했으면 모든 미련을 버려라. 살 각오로 덤벼들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며 죽을 각오로 덤벼야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각오조차 하지 못했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와, 지대로 망해뿟다.”

기상호가 눈앞에 뜬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 공략은 망했다. 그냥 망한 것도 아니고 아주 그냥 좇망했다. 상정했던 최악이 그대로 현실에 이루어졌다. 그래도 아직 까지는 진행형. 기상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도리어 머리가 띵하다던데. 어떻게든 현실적으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생각을 쥐어 짜내던 기상호가 결국 벽에 머리를 박았다. 물리 방어력이 무식하게 올라간 덕분에 아프진 않았는데 열이 나서 그런지 어지럽긴 했다.

어쩌다 상황이 이 꼬라지가 되었나. 기상호는 천천히 상황을 복기하기로 했다. 뭐가 문제인지 알기라도 해야 하니까.

호기롭게 공략을 시작한 것은 좋았다. 그래, 괜찮았다. 서로 떨어지면 망할 게 틀림없으니 최대한 붙어있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긴 했다. 문제가 있다면 이 미궁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미궁이라는 것. 그리고 기상호의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점이었다.

‘몬스터면 무식한 돌대가리일 것이지…….’

미궁은 기상호의 생각보다 정말 똑똑했다. 그것은 우선 최종수와 기상호를 떨어트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리하여 내세운 첫번째 방법이 바로.

“저어, 혹시……. 길을 잃으셨나요?”

인간을 내보내는 것이다. 미궁의 초입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를 쓰러트린 최종수와 기상호 앞에 나타난 사람은 꽤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것은 현대인이라면 편하게 입을법한 후드티와 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도 여기서 길을 잃었다, 같이 나갈 방법을 찾아보자. 꽤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변명은 기상호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이미 죽은 사람을 가지고 이런 장난을 치다니. 기상호는 최종수의 감각마저 속인 것을 정확히 꿰뚫었다. 야, 너……!! 기상호가 이유 없이 살인하는 줄 알았던 최종수는 멀쩡한 모습을 하던 인간이 갑자기 관절을 기괴하게 꺾으며 돌진하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저거 이미 죽은 거예요. 진짜 악질이네. 기상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최종수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 미궁은 사람의 정신을 망가트려 잡아먹는 미궁이고, 그렇게 먹은 것들을 수족으로 부린다고. 이미 죽었기 때문에 구제할 방법은 없다고 말이다.

관찰안이 없었다면 아무리 기상호라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최종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살릴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 소심한 항변이 뒤따랐으나 ‘이미 죽었다.’라는 선고 앞에선 소용없었다. 심장도 뛰고 있고, 모든 생명 활동을 평범하게 하고 있는데 죽은 거라니? 최종수는 상태 이상으로 인간 불신과 인간 혐오를 달고 있었던 주제에 참 감성적이었다. 물론 기상호가 고집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금방 체념했지만.

그 뒤로도 미궁의 ‘같은 사람으로 꼬시기 작전!’은 이어졌다. 똑똑하면 똑똑하기만 하고 멍청할 거면 멍청하기만 하지 미궁은 똑똑하면서도 멍청했다. 안 통한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내보내는 이유가 뭐야? 최종수는 기상호의 지시에 따라 착실히 그것들을 베었다. 일반적인 육체가 물렁물렁한 것인지 최종수가 무식하게 센 것인지 쉽게도 베였다.

기상호는 그때 최종수에게서 보이는 이상 현상을 감지했으면서도 별거 아니라고 여겼다. 상태 이상도 진작 제거했는데 뭐. 참으로 안일한 판단이었다.

똑똑하고도 멍청한 미궁은 그 뒤로 두 번째 작전, 미로를 바꾸기를 시전 했다. 몬스터 웨이브는 덤으로 주면서 말이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이 최종수와 기상호에게 덤벼들었다. 각각의 개체는 별거 아니어서 최종수에게 스탯을 넘겨받은 기상호로도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둘이 전투에 전념하는 사이 땅이 울렸고 벽이 움직였으며 미궁은 기어코 둘을 갈랐다.

물리적으로 떨어지자 최종수는 벽을 부숴서 기상호와 합류하려 했다. 그럴 때마다 미궁은 끔찍한 이명을 퍼트리며 몬스터를 울컥울컥 뱉었고 쓰러진 개체들은 좀비마냥 두 사람의 발목을 붙잡았다.

결과,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사실 당장 떨어진 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네우마 링크 덕분에 서로의 상태와 위치를 알 수 있으니, 미로가 움직이는 규칙만 파악하고 이동하면 충분히 서로에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강화 효과의 시간도 아직 남아있으니 앞으로 7시간 정도는 기상호 혼자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진정한 문제는.

[???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 당신을 보며 입맛을 다십니다.]

이 거지같은 미궁 그 자체였다.

기상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씨발, 이 좇같은 것들은 대체 뭐야!’

‘내 엄마 보고 싶다……. 똘이도 보고 싶다…….’

‘다들, 일단 진정해라. 우선 체육관 앞쪽은 막아뒀으니까 저 괴물들이 더 들어오진 몬할기다.’

‘감독님, 우리 죽으면……. 죽으면 어떡해요?’

거, 보여줄 거면 좀 좋았던 추억으로 보여주지. 심지어 이것들은 기상호의 기억을 매개로 움직이는 환상 주제에 제멋대로 튀곤 했다. 보통 꿈은 자각하는 순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 않나. 기상호는 턱을 괴며 성준수가 욕하는 것을 지켜봤다. 별다른 감상은 들지 않았다. 내 진짜와 가짜도 구분 몬 할 정도로 바본 줄 아나. 기상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제 근처에 접근하는 몬스터만 기가 막히게 때려잡으니 미궁은 전법을 바꿨다.

전경은 여전히 체육관이었으나 이루고 있는 구성품들이 달라졌다. 쌍용기 우승이라도 재현하는 기가. 기상호가 다시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뭐, 이 환상에 안주라도 하라고? 그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환상이 진흙처럼 무너져내렸다.

그 직후 떠올랐던 시스템 창.

[당신의 결속자에게 이상징후가 발생합니다.]

[결속자 최종수님에게 상태 이상, [정신 착란]이 재발합니다.]

[결속자 최종수님에게 상태 이상, [착시]가 재발합니다.]

[결속자 최종수님에게 상태 이상, [인식 저해]가 재발합니다.]

[결속자 최종수님에게 상태 이상…….]

그리하여 기상호는 현재에 이르렀다. 참고로 혹시 몰라 시스템 창은 꺼두지도 않았다. 계속 보면서 문제 복기라도 해야지.

[빠른 시간 내로 [상태 이상]을 처치하지 않을 시, 결속자 최종수님의 모든 상태 이상이 [영구]로 고정됩니다.]

그건 정말 곤란했다. 어떻게 없앤 상태 이상인데. 기상호가 시스템 창에 출력된 문장을 읽으며 턱을 괴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미궁.

환상에 잡아먹힌 최종수.

그리고, 그사이에 홀로 떨어진 연약한 기상호.

[최종수님의 상태이상이 [영구]로 고정되기까지 6:59:58…….]

“내 좇대뿟다, 진짜…….”

슬퍼하지 못해 괴로운 기상호가 벽에 머리를 박으며 웃었다. 진짜 어칸담…….

게이트 생존 수칙 제9번

현실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해라. 모두가 살 수 없다. 설령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가족이라도, 친구라 하더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 같이 죽게 될 것이다.

기상호는 생각했다. 아직 최악의 결말에 도달하진 않았다. 바꿔말하자면 얼마든지 이 거지 같은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단 소리다. 기상호는 온갖 상태 이상을 달고 다니면서도 저를 알아보았던 최종수에게 사활을 걸기로 했다.

앞으로 남은 강화 효과 유지 시간은 5시간 30분 정도. 최종수가 완전히 미치기까지는 약 7시간. 만약 미궁에 최종수가 그대로 귀속되면 그 능력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공략 난이도가 어떻게 뛰어오를지 모른다. 안 그래도 생존 난이도 S급인데 보스 몬스터로 최종수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면…….

“……나쁜 생각은 그만하자.”

기상호가 제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고 일어섰다. 자고로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오는 법이고 기상호는 준비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기상호는 기회를 만들기로 했다.

‘나오는 몹들은 전부 페이크다. 진짜를 잡으려면 미궁의 중심부까지 이동해야 한다.’

핵을 처치하기 전까진 뭘 하든 같은 결과만 나올 것이다. 기상호는 홀로 미궁의 중심을 공략하는 선택지와 최종수를 찾아간다는 선택지 중 무엇을 고를까 고민했다. 아직 프네우마 링크로 연결된 상태니까 최종수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상호가 고민하고 있으니 땅이 울리며 길이 열렸다. 마치 이쪽으로 가라는 듯 유도하는 것만 같았다.

“허…….”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기상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젠 아예 도발하네? 짧게 고민한 기상호가 결론을 내고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결론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0.03초이므로 실질적으로는 곧장 움직였다고 봄이 옳다.

구불구불한 미로가 직선으로 트였다. 기상호가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몬스터의 습격은 없었다. 심지어는 최종수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이건 제대로 도발하는 게 맞다. 기상호가 웃었다. 이거 열받는데.

한참을 걷던 기상호 앞에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였다. 검고, 흉흉하고, 존재 자체로 사람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거세게 움직였다.

[ Danger!! ]

굳이 띄워주지 않아도 위험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시스템은 친절하게도 새빨간 창을 띄웠다. 검은 무언가와 거리가 100m는 넘게도 남아있는데 그 흉흉한 기세가 피부를 짓눌렀다. 기상호가 어두운 연기에 휩싸여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기압이 폐부를 압박한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중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검은 연기가 점차 거대하게 퍼져나간다. 흉흉한 기세가 피부를 찌른다. 만약 저것이 그대로 이 미궁의 몬스터가 된다면 이 게이트의 공략 난이도는 아예 논외가 될 것이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기상호의 옷을 찢었다. 특수 소재로 만든 옷인데도 이렇게 쉽게 찢기다니. 이제는 더이상 웃을 수도 없었다.

거리 80m. 아직 멀다.

―분명 멀었는데.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피부가 너덜너덜하게 베였다.

동체시력은 분명 움직임을 따라갔으나 몸은 느렸다. 염력이 태풍처럼 돌며 기상호의 옷을 너덜너덜하게 찢었다. 사이로 피가 줄줄 샜다. 커흑. 내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기상호의 입에서 울컥 핏덩이가 쏟아졌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방심한다면 그대로 고깃덩어리가 될지도 모른다. 1초. 검은색 검을 든 최종수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기상호 앞에 섰다.

조금만 더 반응하는 속도가 느렸다면 지금쯤 기상호는 두 개로 갈라졌을 것이다. 최종수가 준, A급 아티펙트 검에 금이 갔다. 미친 거 아냐? 욕을 짓씹을 새도 없이 바닥에서 연속적으로 떠오른 그림자가 움직이는 함정처럼 솟구쳤다.

기상호가 물러선다. 그를 짓누르는 압박이 강해졌다. 최종수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표정으로 느릿하게 걸었다. 고작 한 번 검을 맞대고는, 기상호가 개허접이라는 것을 안 것처럼 여유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온몸을 짓이기는 돌풍이 섞였다. 기상호가 입술을 내리 물었다. 핏줄이 터져 나온다. 최대한 전투 없이 상황을 끝냄이 옳다. 개허접인 기상호로는 최종수를 타개할 수 없으니 말이다.

“햄, 저예요. 기상호!”

공격이 연속으로 쇄도하는 와중 기상호가 소리쳤다. 기상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했다. 이마저도 스탯이 상승하지 않았다면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상호는 공격을 피하면서도 어떻게든 최종수에게 자신을 어필했다. 소리도 쳐봤고 살그머니 도발도 했으며 붙잡기도 했다. 최종수는 기상호가 붙잡는 순간 바람처럼 몸을 빼고 다음 공격을 날렸다.

틀렸다. 대화를 하기는커녕 말이 제대로 전달되는지도 알 수가 없다. 미궁이 완전히 포식하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다. 기상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종수햄.”

기상호는 이번에 공격을 피하지 않고 다가갔다. 압력을 따라 움직이는 공기가 마치 태풍처럼 주변을 휘감는다. 서 있기도 고작인 환경에서 기상호가 다시 한 걸음을 움직였다.

칼날과도 같은 바람에 이어 중력까지 몸을 짓누른다. 기상호가 짧게 신음을 내뱉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자잘한 상처에선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몸은 무게추를 몇 개나 달아놓은 것처럼 무겁기만 하고. 최종수는 직접적인 전투를 하는 대신 멀리서 그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기상호가 다시 일어났다. 최종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몇 걸음 안 되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기상호는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최종수가 물러섰다.

다시 한 걸음. 최종수는 이제 아예 손을 들고 마지막 공격할 준비를 했다.

섬광처럼 쏟아지는 검은 창들이 피부 사이사이로 짓이긴다. 직접적인 치명상을 내지 않는 공격은 기상호의 자잘한 상처를 늘렸다. 피가 흐름에 따라 혈향이 더욱 짙어졌다.

마치 멈추라는 듯, 거기서 더 다가오지 말라는 듯 그림자로 이루어진 칼날이 기상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죽이려면 진작 죽일 수 있을 텐데도 최종수는 그리하지 않았다.

이는 미궁의 의지가 아닐 것이다. 아직 최종수는 죽지 않았고 완전히 미궁에 삼켜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조금 더 도박해보는 건 괜찮을 것이다. 기상호는 만신창이로 다시 걸어 나갔다.

또다시 한 걸음. 내딛자 최종수가 검을 쥐고 자세를 고쳤다. 드디어 기상호를 죽일 결심을 한 것일까, 아니면 이조차도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일까. 기상호는 최종수를 보며 웃었다.

최종수로부터 검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매 순간 정신을 갉아먹었다. 기상호는 시야 한구석에서 깜빡이는 붉은색 창을 껐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슬슬 처치하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지만 그는 제 상태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젠장, 내가 저 상태 이상을 어떻게 다 없애놨는데. 욕지거리를 삼켜도 최종수는 정신을 차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간당간당한 HP에 시야도 깜빡깜빡 흔들렸으나 기상호는 굴하지 않았다.

“종, 수햄…….”

제대로 이름을 부르고 싶어도 입으로 울컥 쏟아져 나오는 피 때문에 발음이 뭉개진다. 기상호는 최종수를 마주했다. 똑바로 쳐다보며 재차 이름을 부르자 최종수의 움직임이 확연히 이상해졌다. 마치 명령어가 입력된 기계마냥 움직이던 최종수가 움찔거렸다.

흰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졌던 기상호의 옷은 새빨갛게 물든 채로 옷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검격이 쏟아진다. 싸구려 방어구로는 약간의 충격도 흡수하지 못할 터.

“하하……, 씨. 드릅게 아프네…….”

그림자로 만들어진 검이 그대로 기상호의 어깨에 박혔다. 주변으로 퍼지던 혈향이 짙어진다.

분명 반으로 갈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검격이었다. 그러나 최종수는 중간에 멈췄다. 아주 찰나의 망설임이었으나 기상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쉐도우 링크(S)의 효과에 따라 확장된 감각의 정보를 전달합니다.]

[!주의! 대상이 연결을 거부할 시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이제 진짜 간당간당하다. 애써 정신을 붙잡은 기상호가 웃었다.

패시브라서 온 오프 기능도 없고, 그런 주제에 MP의 99% 이상을 소모해서 다른 스킬도 못 배우게 만드는 극악의 스킬, [관찰안(Ex)]. 이는 기상호가 아닌 타인이 받아들이면 그대로 뇌가 녹을 정도의 폭력적인 정보를 쏟아낸다. 그리고 이 관찰안으로 얻는 정보를 [쉐도우 링크(S)]로 제한 없이 전달할 시 그것은 그대로 공격이 된다.

사람의 정신을 헤집는 정보가 폭력적으로 쏟아지자 최종수가 주춤했다. 그는 잡힌 손을 빼지도 못한 채 한 손으로만 머리를 부여잡았다. 기상호의 어깨에 박힌 검이 연기처럼 흐트러졌다.

“진짜 귀찮은 사람이다, 최종수…….”

이번 As는 유상이라고요. 기상호가 손을 뻗어 제 어깨에 검을 박아넣은 최종수의 손을 잡았다. 이름이 불린 순간부터 최종수는 저항하지 않았다. 기상호는 그렇게 잡은 손을 당겨 최종수를 제 품으로 안았다. 아, 이러면 피가 묻을 텐데. 뭐 어때, 좀 묻을 수도 있지. 흘린 피가 너무 많아 제정신이 아닌 기상호는 그럼에도 잔잔히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괘않아요.”

상처투성이의 손이 천천히 최종수의 등을 쓸어 내린다. 괜찮다는 단 한 마디에 그의 등이 들썩였다. 기상호는 거대한 덩치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제 햄은 괘않아요.”

지나치게 피를 흘린 탓일까, 발음이 조금씩 샜다. 내 이러다 과다출혈로 먼저 죽것네……. 기상호가 제 상황을 한탄하면서도 최종수를 도닥였다. 어깨로 뜨거운 무언가 닿았다. 사실 진즉 피로 젖고 너덜너덜해진 터라 느낄 감각 따위는 없었지만.

최종수를 품에서 떼어낸 기상호가 흘러내리는 그의 눈물을 닦았다.

최종수의 양 뺨을 잡은 기상호가 입을 맞췄다. 눈물과 피가 뒤섞인 입맞춤은 엉망이었다. 짜고, 비리고, 쓰고, 최종수는 원래도 키스를 개못하고.

기상호와 최종수 앞으로 시스템 창이 여럿 떠올랐다. 흐릿해진 정신으로는 뭐라고 써진 지 읽기도 힘들었다.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것도 슬슬 한계다. 시간 내로 처치를 안 하면 뭐, 죽기야 더 하겠어? 입을 떼어낸 기상호가 웃었다. 최종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미 HP는 마이너스고, 최종수의 상태 이상은 처치 되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기상호도 미궁에게 먹힐 판이이다.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 중에서 가장 문제인 건 무엇일까? 출근하다 난데없이 생존 난이도 S급 게이트에 던져진 일? 아니면 거기서 최종수를 만나게 된 거? 패기롭게 단둘이서 공략을 시도한 거?

……아니면, 기상호가 끝내 최종수의 내면을 읽고 동정하고만 일일까.

“그니까 종수햄,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어째서 최종수는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마지막에 힘을 빼고 기상호를 죽이지 않았나.

초점 없는 시야가 기상호를 바라본다. 최종수의 청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눈을 감을 때 긴 속눈썹이 살랑거렸다. 시야에 잡힌 것이 사물임을 인지 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얼마일까. 최종수가 정신을 차리기까진 얼마나 걸릴까.

기상호가 웃었다.

“있잖아요, 햄. ……우리 나가면 같이 농구나 한번 할래요?”

햄이 진심으로 오면 내 죽으니까, 살살 하는 걸로……. 이어지는 발음은 흐려지는 의식을 따라 뭉개졌다. 기상호의 몸이 실 끊긴 인형처럼 툭, 무너진다.

눈앞에 잇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고 반사적으로 그 몸을 받아들었으나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최종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상호?”

그 발음을 따라, 마침내 정신을 차린 최종수가 제 품에서 색색거리는 기상호를 보았다.

게이트 생존 수칙 제10번

그럼에도 모두와 함께 살고자 한다면…….

기상호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

생각보다 통증은 없었다. 분명 눈을 떴으나 새카맣게 물든 시야에 기상호가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 이래 죽고 말았구나……. 눈물이 죽죽 흘렀다. 안녕, 사놓고 아직 보지 못한 만화책들아. 안녕, 다음 달에 개봉한다던 애니메이션 극장판아, 그리고 내 20대 청춘아! 기상호는 분명 소리 없이 울었지만 처량한 훌쩍임이 주변을 채웠다. 뭘 하길래 저러는지 구경하던 최종수가 혀를 차고야 말았다.

“야, 깼냐?”

“헉, 이 목소리는……. 결국 종수햄도 죽고 만 거군요.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는 해요……. 아, 그럼 설마 여기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에요……?”

“개소리 그만하고 일어났으면 옷 갈아입고 밥이나 먹어.”

보이는 게 없는 와중 들리는 목소리가 자못 다정하다. 제 얼굴 위에 무언가 덮여있음을 깨달은 기상호가 안대를 벗었다. 이게 뭐꼬. 빛 한 점 들지 않는 안락한 시야를 자랑한 안대는 무려 A급 아이템이었다. 수면의 질을 상승시켜 자연 회복률을 최대 230%까지 끌어올리는……. 이런 게 왜 존재하지, 설명창을 읽던 기상호가 안대를 내려놓았다. 어딜봐도 안대는 최종수의 것이었다.

이어 기상호는 제 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만신창이로 기절한 것치고 그는 꽤 멀쩡했다.

스트레칭을 하자 남들보다 긴 팔이 쭉 뻗어져 나간다. 자잘한 상처는 전부 아문 상태였다. 기상호는 혹시 최종수와의 전투가 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옷 상태를 보고 바로 철회했지만.

바지는 피에 푹 절여지다 못해 굳어서 잘 움직이지도 않고, 상의는 아예 벗겨져 있다. 어깨엔 옷 대신 붕대가 자리했다. 가만히 제 어깨를 눌러보던 기상호가 곧 침음성을 내뱉었다. 하기사, 몸을 반으로 갈라버릴 기세로 검날이 박혔었는데 멀쩡하면 이상하다. 그래도 상처가 터지진 않았다. 기상호는 금방 제 상태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정말 멀쩡하다! HP가 마이너스까지 내려갔던 것까지 생각하면 기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어깨의 상처만 덜 아물어 미약하게 통증이 느껴질 뿐, 나머지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최고급 포션이라도 뿌렸나? 기상호가 최종수를 보았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최종수는 다른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를 내밀고 있었다.

“옷.”

“넹?”

“……더 못 쓸 거 같아서 일단 버렸어. 이거라도 입어.”

“헐, 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저 입어도 돼요? 막, 나중에 갚으라고 하는 거 아니죠?”

“……아예 줄 테니까 그냥 입어.”

“감삼다.”

기상호가 옷을 받았다. 최종수가 준 옷은 기존에 기상호가 입던 보급형 방어구와 비교하면 미안할 정도로 최고급이었다. 대신 디자인은 좀 구렸다. 올블랙이 뭐꼬, 올블랙이. 암살자도 아이고. 기존 옷을 나름 마음에 들어 했던 기상호가 쩝,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같은 남잔데 최종수는 뭘 그렇게 내외하는지 기상호가 옷을 갈아입을 동안 한 번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다 갈아 입었…….”

“아, 햄아. 이거 이렇게 입는 거 맞죠? 이래 비싼 옷은 처음 입어봐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하여간 기상호. 존나 느려터져선.”

여기서 갑자기 디스를? 기상호가 억울함을 항변하려는 순간 성큼 다가온 최종수가 옷 단추를 대신 잠갔다. 약 20개가 넘는 단추를 순식간에 해치운 최종수가 이어 기상호의 귀에 무언가를 끼웠다. 아얏, 짧게 비명이 샜다. 그것이 방어용 아이템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기상호는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기상호 ver.최종방어형, 완성. 추가 아이템 장착까지 마친 기상호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제 상태를 체크했다. 확실히 비싼 값은 하는지 움직이기 수월하다.

옷 다음은 식사. 그럴듯한 식량을 조달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음식은 대체 식사였다. 군용 식량보다 맛이 없네……. 기상호의 입이 쉬지 않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배는 고팠기에 전부 먹었다. 식사를 끝마친 기상호가 본격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기절하고 얼마 정도 지났을까. 인던 내부는 시간을 확인하기 어려워서 짜증 난다. 그러는 동안에도 최종수는 기상호만을 보았다. 탐색하던 기상호가 뜨거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요. 사람 노려보지 말고.”

“안 노려봤는데.”

“네, 네. 그러시겠죠.”

특유의 동공 때문에 최종수의 시선은 유달리 매서웠다. 와이라노. 기상호는 부러 최종수를 피해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런 기상호가 못마땅하다는 듯, 최종수는 불만이 한가득 담긴 목소리를 냈다.

“야.”

“네넵.”

“……왜 그랬어?”

“뭐가요?”

“…….”

뭘 묻는 거지, 하며 기상호가 목을 긁적이자 최종수가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알면서 되묻냐? 표정에서 묻어나오는 짜증에 기상호가 눈을 굴렸다. 답을 알고 되물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직전까지 아무런 말도 없었기 때문에 최종수가 저를 죽이려 했단 사실을 묻으려 하는구나 짐작했을 뿐이다.

오히려 기상호로서는 최종수가 구태여 묻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상태 이상도 전부 처리했고, 멀쩡해 보이는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는가. 최종수는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왜 그랬냐고. 너라면 굳이 나를 구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공략을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음, 뭐…….”

최종수는 예상외로 정곡을 콕 찔러왔다. 기상호는 저를 똑바로 보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뒷머리를 긁다 멋쩍게 웃었다.

“구할 수 있었잖아요. 아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것도 찜찜해가…….”

최종수의 말마따나, 그를 구하지 않더라도 공략을 끝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난이도는 차라리 그쪽이 쉬웠다. 다른 헌터라면 방법의 ‘ㅂ’도 못 찾았겠지만 기상호는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상호는 최종수를 구했다. 제 죽음을 불사르고,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걸었다. 결과적으로 기상호는 최종수를 구하는 데 성공했으나 죽을 뻔했다. 최상급 포션을 있는 대로 붓지 않았다면 기상호는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며칠 같이 지냈다고 정들었나 봐요. 그러면 꼭 햄이 내땜시 죽는 것 같고, 그래가…….”

뭐 둘 다 잘 살아났으니 된 거 아닐까. 기상호가 덧붙이듯 말하며 웃었다. 아는 사람이 죽거나, 혹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상태가 될 것을 뻔히 아는데 저 혼자만 살자고 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을 끝낸 기상호가 처음으로 최종수를 마주 봤다. 언제나처럼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종수를, 그가 마주쳐오는 시선을 말이다.

태풍을 닮은 동공이 돌아간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이전과 달랐고, 또 선명했다. 순식간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들에 기상호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힉.”

사람이 너무 놀라면 딸꾹질하게 된다던데, 지금이 꼭 그랬다. 설마, 그럴 리가. 선명하고도 또 선명한 감정에 기상호가 보이는 것을 부정했다. 분명 이곳은 게이트 안이었으나 지금 기상호를 감싸고 있는 것은 최종수였다. 정확히는 그가 눈을 맞추며 전해오는 감정이, 기상호의 전부를 채우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그럴 리 없었다. 기상호는 처음으로 제 능력을 의심했다. 최종수는 사람을 불신한다. 상태 이상을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관성처럼 남은 불신은 그가 쉬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기상호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최종수에게 있어 기상호는 5년 전에 코트 위에서 만난 불편한 애, 혹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심연까지 꿰뚫어 보는 불쾌한 괴물이어야 했다. 서로를 미지로 여기며 영원히 이해하지 못해야 할 텐데, 평행선을 달려야만 할 감정이 교차 선을 만났다.

죽음의 위기를 기점으로 두려움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자리한 감정은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애냐? 밥 먹고 딸꾹질하게?”

저 지금 밥 때문에 딸꾹질하는 거 아닌데요. 기상호가 미처 반문할 새도 없이 최종수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휘몰아치는 눈을 한 채로, 기상호의 양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눈을 감지도 않았다. 최종수도 눈을 감지 않았고 놀란 기상호 역시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이전에도 둘은 몇 번이고 입을 겹쳤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킬의 강화 효과를 위한 것이었다. 감정이 있다고 해봐야 상대방을 향한 두려움, 거기에 이겨 먹고 말겠다는 승부욕 정도였는데.

혹여나 제 힘이 기상호에게 상처를 낼까, 힘을 뺀 채로 몇 번이고 뺨을 고쳐잡은 최종수가 부드럽게 기상호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통증을 낼 만큼 강한 입질은 아니었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것이 포개어진다 싶더니 치열을 훑은 혀가 곧 입 안쪽으로 침투해온다. 타액이 오가며 혀가 장난스럽게 얽혔다. 분명 방금까지 먹던 비상식량의 맛이어야 하건만 키스는 의외로 달았다. 마치 연인끼리 입을 맞추듯 포개어진 입술에 이어 몸이 밀착됐다. 무력한 9급 헌터는 감히 저항하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파도에 휩쓸리는 감각이 들었던 그 감정이 이제는 기상호를 온전히 침몰시켰다. 이대로 있다간 질식하고 말 것이다. 기상호가 최종수를 밀어냈다. 그러면 최종수는 가소롭다는 듯 웃고 각도를 틀어 다시 입을 맞춰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하나하나 전부 시야에 담으려는 것처럼.

딸꾹질 때문에 들썩이던 몸이 모자란 숨 때문에 점차 진정되었다. 최종수는 기상호가 딸꾹질을 멈추고 나서도 몇 번 더 그의 호흡을 제 입에 담았다.

[프네우마 이메진(A)에 따라 대상자에게 강화 효과를 전달합니다.]

[서로 간의 신뢰가 충분합니다. 강화 효과가 상승합니다!]

[검은 태풍(S)의 스탯 일부가 무형 지휘자(-)에게 전달됩니다.]

“가, 갑자기 무슨 짓을!”

시스템 창이 떠오르고 난 이후에야 기상호는 최종수를 완전히 밀어낼 수 있었다. 몇 번이나 겪어도 스탯이 상승하는 감각은 생소하다. 이전보다 월등히 높아진 힘에 기상호가 표정을 구겼다.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키다 기어코 맛이 가고 말았나. 기상호가 경악하는 동안 혀로 입술을 적신 최종수가 태연하게 말했다.

“왜? 딸꾹질하니까 도와준 거잖아.”

“……꼭 이런 식일 필요는 없잖아요.”

“없긴 왜 없어, 공략 아직 덜 끝냈는데.”

“…….”

뭐라 답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기상호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최종수 진짜 뻔뻔하다……. 이마를 짚는 기상호를 보며 최종수가 그를 당겼다. 왜요, 하고 물어보려던 기상호는 즐거워 보이는 최종수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기상호를 보며 최종수는 장난치듯 말했다.

“니 스킬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있지?”

“이거 독심술 아니거든요?”

“맞춰 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상호의 허리를 당겨 안은 최종수가 다시 그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엔 눈을 감은 채였다. 여전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기상호가 하는 수 없이 응하듯 눈을 감았다. 지능 몰빵형 스탯 덕분에 양자 컴퓨터처럼 수많은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던 기상호의 뇌가 파업을 선언했다. 무리다. 지금은 판단 불가다. 아니, 애초에 지금 채워지는 정보가 최종수밖에 없었다.

밀착된 몸 사이사이로 열기가 피어오른다. 이 이상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상호는 최종수의 체온에 매달렸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달리는 기상호가 숨차하면 최종수는 잠깐 떨어졌다. 입 사이로 연결된 실선이 끊어지기도 전에 곧장 맞춰오는 터라 기상호는 아직 숨을 덜 골랐다고 항의하지도 못했다.

스킬의 영향일까, 혹은 원래도 이런 걸까. 감정이 온전히 전해져오고 지금 섞이는 게 제 혀인지 상대의 혀인지 구분도 안 될 정도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아, 이래도 되나. 확실히 기분은 좋았다. 이 좋다는 게 최종수의 기분인지, 아니면 원래 기상호가 가지던 감정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점을 빼면.

마침내 최대까지 버프 시간을 채운 두 사람이 떨어졌다. 여즉 머리로 몰린 열이 빠지지 않았던 터라 기상호가 다른 곳이나 보며 헛소리했다. 하하, 쌍방 버프가 확실히 편하긴 하네요. 굳이 복잡한 방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려던 말을 꺼내던 기상호가 굳었다. 주변에 몬스터 시체가 즐비해 있다. 대체 언제……? 기상호가 질겁하자 최종수가 픽 웃었다.

“더 하고 싶으면 더 해도 되고.”

“……그런 말 안 했는디요…….”

“아쉬워 보이는 표정이라서.”

“아쉽긴 대체 누가?”

생존 난이도 S급치고는 긴장감이 조금도 없다. 이게 정말 죽다 살아난 사람들이 할만한 대화란 말인가. 기상호가 괜히 화냈다. 최종수는 그런 기상호의 머리를 쓰다듬기나 했다. 키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그는 제 키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즐기는 듯했다.

게이트 생존 수칙 제???번

그리하여 당신은, 감히 기적을 바란다면…….

이후 공략은 정말 별거 없이 끝났다. 본래라면 복잡해야 했을 미로 돌파는 기상호가 알아서 해결했다. 중간중간 나타나는 몬스터는 최종수가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나마 문제라고 할만한 것은 환각과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몬스터 정도였는데 기상호의 걱정과 달리 최종수는 심드렁한 기색을 내보였다.

미로의 한가운데에는 하얀 대리석 기둥이 있었다. 몬스터라고 하기엔 애매한 저것을 처리하면 이 거지 같은 게이트도 공략 끝. 여태 있었던 일들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무난한 공략이었으나 마지막은 역시나 반전이 있었다.

“미친, 이 게이트 몹은 다 자폭만 하나.”

“……왜 미리 말 안 했어?”

“아니, 이건 내도 몰랐다고요. 이런 식으로 자폭할 줄 알았나…….”

마지막 반전은 역시나 자폭이었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만 같은 이명이 사방을 둘러싸며 이루어진 정신 공격은 기상호도 꽤 위험할 정도였다. 옆에서 최종수가 버텨주지 않았다면 사이좋게 전멸할 뻔했다. 그래도 무사히 공략을 끝냈으니 참 다행인 일이었지만…….

“이것도 모르면서 헌터를 해? 이거 길 가다 객사할 놈이네. 그딴 식으로 할 거면 헌터 때려치워라.”

“내 덕에 깼으면서 이런 막말을?”

“헌터 때려치우라고.”

“싫어요.”

최종수가 되도 않는 걸로 시비를 거는 건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기상호가 질겁했다. 최종수는 무슨 염불이라도 외우듯 기상호에게 ‘헌터 때려치워.’를 반복할 때였다.

[환상 미궁:에레보스 공략 완료!]

[최고 공헌자: 검은 태풍(S), 무형 지휘자(-)]

[보상을 확인 중입니다…….]

[보상 정산 완료!]

[놀라운 업적 달성! 미궁이 이어준 인연]

[업적 보상, ‘불가해의 동고동락’ 칭호가 주어집니다.]

이후로도 보상 관련 창이 줄줄 떠올랐다. 이게 뭐지. 기상호가 반사적으로 YES를 누르니 스킬 하나가 업데이트되었다. 그는[프네우마 링크(A)가 프네우마 아누스(S)로 업그레이드됩니다.]를 멍하니 바라봤다. 외에도 뭐가 많았다. 기상호가 올라오는 정보들을 확인하는 동안 최종수는 보상으로 정산받은 아이템 중 반지 하나만 확인했다.

“……종수햄아?”

“왜.”

“갑자기 반지를 제 손에 왜 끼우시는지……?”

것도 하필 약지에. 기상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최종수가 표정을 구겼다.

“너 설마, 스킬만 믿고 설명 창 안 읽었냐?”

“네?”

사실 그렇긴 했다. 기상호가 아닌 척 반지의 정보를 확인했다.

[아이템: 옥오지애(?)]

: 지극한 애정은 죽음마저도 초월할지니. 불가해를 넘어선 사랑에 축복을!

-반지를 소유한 이의 상태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지를 소유한 이들은 서로 공격할 수 없습니다.

결속자와 함께 행동 시 이동력 +30%

결속자와 함께 행동 시 공력력 +50%

결속자와 함께 행동 시…….

일각삼추: 언제든 결속자와 제한없이 연락이 가능하며,

1일 1회 결속자의 곁으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이동 재사용 대시 시간 공유

감정이 덜된 것인지 정보로는 ‘?’가 뜨는 반지는 설명이 단출한 것에 비해 엄청난 효과를 자랑했다. 공격력 증가폭부터 말이 안 됐다. 반지를 소유한 이들이 파티라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부가적인 설명을 읽던 기상호가 곧 표정을 구겼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 가능, 상대방의 상태 확인 가능, 함께 행동할 시 회복력 향상 등등. 어째 효과가 전부 세트다. 더불어 언제든 연락이 가능한 무한 배터리 연락 기능에 쿨타임을 공유하는 이동 스킬까지. 기상호는 생각했다. 이거 게임에서 자주 보던 결혼 아이템 아이가. 최종수가 고개를 까딱였다. 세트로 이루어진 이 아이템은 쌍방으로 반지를 끼워줘야 효과를 내는 것이었다.

“……이거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쓰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요…….”

효율적인 면에서 1급 헌터끼리 사용하는 게 더 낫지 않냐고 말하던 기상호는 곧 최종수가 내뿜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눌려 찌그러졌다. 물리적으로 찌그러졌다. 최종수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지금 내 손에 반지를 끼우지 않으면 니 목숨이 날아갈 거란 의사가 가득한 표정에 기상호는 쭈그러든 얼굴로 겨우겨우 최종수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자동 사이즈 조절 기능이 있는 아이템답게 반지는 즉시 사용자에게 맞춰 줄어들었다. 공명이라도 하듯 빛나던 반지가 빛을 잃고 꺼지자 대신하여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프네우마 아누스 효과 강화……. 기상호는 생각하기를 포기하며 창을 껐다. 나중에 읽어야지. 나중에 읽는다고 적힌 내용이 달라질 리 없건만 그는 괜히 현실도피를 시도했다.

최종수는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제 손을 계속 보았다. 검은색 보석이 콕 하고 박힌 은색의 링은 어딜 봐도 커플링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뭐 본인이 만족한다면 아무래도 좋을 일 아닌가. 어째 밖으로 나가서 정리해야 할 게 많아졌지만, 좋은 게 좋은 법이다.

게이트 생존 수칙 제???번??

살아남은 것을 축하한다.

약 한 달의 생존 끝에 기상호와 최종수는 드디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공헌도에 따라 게이트 핵은 최종수에게 주어졌다. 갑작스러운 싱크로 인하여 이루어진 공략이기 때문에 게이트 보존은 필수적이다.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게 조사를 할 필요가 있으며 이 게이트에 휘말린 것으로 인한 사망자도 확인해야 하니까. 기상호가 게이트를 소멸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자 최종수는 고개만 까딱였다. 그 표정이 마치 ‘너 하는 거 봐서.’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여간 최종수는 참 제멋대로였다. 1급이라서 더욱 그랬다.

드디어 밖이다. 기상호가 텁텁하고 짠 내가 섞인 도시 공기에 숨을 스읍, 하 하고 내쉬었다. 한낮의 태양이 쨍하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온갖 몬스터의 오물을 뒤집어쓰고 악취를 내뿜는 두 헌터를 보고 곧장 신고했으리라.

준법 시민의 신고가 없더라도 기상호는 협회에 미등록 게이트를 신고했다. 조사를 위해 파견된 협회의 직원들이 두 사람을 연행하듯 협회 건물로 데려갔다. 가는 도중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게 최종수를 알아본 듯했다. 기상호가 실종된 기간은 총 일주일, 최종수의 실종은 확인 불가. 꼬여버린 시간 때문에 확인해야 할 것이 많았다. 최종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확인은 기상호가 했다. 지금 당장은 피곤하고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어가……. 기상호는 간단한 서면을 작성하며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따로 부치겠다고 얘기했다. 게이트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역시 일주일 후에 시작하기로 결론 났다. 협회 건물에서 샤워까지 마친 기상호가 기지개를 켜며 맑은 하늘에 감사했다. 오랜만에 하늘이 우중충했다면 기상호의 기분도 우울했을 것이다.

마침내 필요한 서류를 모두 작성하고 임시 자유가 된 기상호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순간.

“꼬라지 보니까 살만한가 보다?”

사신이 강림했다.

“엇, 그. 준수햄…….”

“상호야, 내가 연락템 빼놓지 말고 챙겨 다니라고 했냐 안 했냐? 그리고 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협회 쪽으로 들어야 하겠니? 나오자마자 길드에 연락할 생각은 안 들고 협회에 신고할 생각 먼저 들든?”

“……그게요…….”

준수햄이 무서워서 연락 못 했습니다. 기상호는 진실의 입을 봉인했다. 성준수는 그 뒤로도 상냥하고 친절한 걱정을 읊었다. 지금 너 걱정한다고 다른 애들 똥쭐 타는 건 신경도 안 쓰이지? 그리고 협회 갈 땐 혼자 가지 말고 다른 길드원 데려가라고 했어, 안 했어?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긴 한 거냐? 너 하나 빠지면 길드 좇되는 거 몰라서 그래? 차라리 욕이라도 한 바가지 시원하게 쏟는다면 잉잉 울고 말 텐데. 기상호가 속으로 울었다.

“그래. 어디 변명이라도 해봐.”

“……죄송합니다.”

“변명이라도 해보라니까?”

“죄송합니다…….”

하필 협회 건물 앞에서 혼나는 거라 구경꾼들도 몰려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래? 몰라. 근데 저 사람 되게 잘생겼다. 그보다 저 뒤에, 최종수 아냐? 몰려든 사람의 숫자가 열을 넘었을쯤 배경처럼 서 있던 최종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적당히 하지?”

드디어 최종수의 존재를 인식한 성준수가 표정을 험악하게 구겼다. 성준수에 이어 기상호를 맞이하러 온, 정확히는 관중처럼 서 있던 지상 길드원들도 술렁거렸다. 저사람 최종수 아님? 점마가 와 여있노. 최종수가 눈데. 님 벌서 최종수 잊었음? 인간태풍 있잖슴. 안다, 아는데 갸가 와 여 있는긴데? 그러는 동안 기상호를 한 가운데 낀 최종수와 성준수의 눈싸움이 이어졌다. 성준수도 나름 상위권 헌터인지라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시렸다. 물리적으로 시린 기운이 풀풀 풍겼다. 최종수가 끝까지 눈싸움을 피하지 않자 성준수가 타겟을 바꿨다.

“야, 야. 상호야. 이건 뭐냐?”

“햄, 그게요…….”

“사람 보고 이거라고 하면 기분 나쁜데.”

“상호야, 저거 뭐냐?”

“너네는 방금까지 게이트에 휘말리고 온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하냐?”

“해보자는 거냐?”

“원한다면.”

“미치겠다…….”

기상호가 머리를 감쌌다. 최종수는 한낮에 음산한 기운을 뿜어대고, 성준수는 정말 공격이라도 할 기세다. 악과 깡으로 무장한 유리 대포 성준수가 제대로 포격한다면 최종수라고 성치 않을 터. 그 전에 제압한다면 문제가……, 없겠냐? 진짜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기상호가 팔짝 뛰었다.

“종수햄 없었음 내 지금쯤 죽었을 텐디 함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야, 기상호. 너 설마…….”

상황을 종식하기 위한 기상호의 항변은 일촉즉발이 되고 말았다. 단 한마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눈치챈 지상최강 전원이 경악했다.

“님 설마 최종수랑 같이 게이트 공략한 거임?”

“아니지? 상호. 빨리 아이라고 해라.”

“……상호, 이건 내도 쉴드 몬 친다. 단디 말해라.”

진재유까지 혀를 찼다. 그동안 최종수와 지낸 게 지나치게 익숙해진 기상호가 문제의 원인을 깨달을 때, 공태성이 나섰다.

“밖에서 이래 있지 말고 들가서 얘기하죠? 그리고 여 협회 앞이라 쌈 나면 안 되는데요.”

그건 그랬다. 지금도 협회 직원이 언제쯤 공무 방해를 걸지 각을 재고 있었다. 공태성의 말이 제일 이성적이라는 사실에 자존심 상해하던 성준수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기상호의 귀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너 제대로 설명 안 하면 죽을 줄 알아라.’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제법 살벌했다.

성준수가 기상호의 귀를 집는 순간 반사적으로 공격하려던 최종수를 말린 사람은 공태성이었다. 사정이 있나 본데 괜히 일 키우지 말고 가서 아 상태 좀 보죠? 최종수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따라갔다.

이후 길드 건물에 도착한 기상호는 이현성으로부터 잔소리 2탄으로 1시간을 추가로 허비해야만 했다. 최종수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취급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 성준수와 이현성의 잔소리로 도합 2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풀려난 기상호가 잉잉 우는 얼굴을 했다. 피곤해 죽겠는데 잔소리는 좀 스킵하면 안 되나. 안 됐다. 짱짱한 해가 조금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마침내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실직고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는 간짜장 곱배기루다가요.”

“……이 상황에서 밥을 먹는다고?”

“솔직히 햄도 배고프잖아요. 이거 길드 공비로 사는 거니까 햄도 골라요.”

그 전에 밥부터 먹고. 분명 심각한 얘기를 하는 건 틀림없이 맞건만 지상최강의 분위기는 묘하게 느른했다. 그나마 살기를 날리던 성준수는 탐탁지 않단 표정으로 최종수를 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시킨 음식이 줄줄이 도착하고 난 이후 기상호의 주둥이가 열렸다. 출근하다 난데없이 게이트에 휘말린 것부터 시작해 최종수와 마주하고 단둘이 공략하게 된 이야기까지. 물론 이쯤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면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들켰냐?”

“들킨 건……, 아니죠? 제가 말해줬으니까요.”

“상호야, 지금 웃음이 나오냐?”

“넵, 죄송합니다.”

기이한 구조를 가진 기상호의 스킬셋은 특급 비밀이다. 하기야, 정보전에 특화된 스킬인 만큼 이상한 첩보전에 끌려가기 충분하니 말이다. 성준수가 진재유를 보며 소곤거렸다. 재유, 처리할까? 작게 말해도 다 들릴 텐데 그들은 거리낌 없었다. 심지어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종수햄은 괜찮아요. 진짜로…….”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저 새끼 1급 아냐? 불신 가득한 눈이 최종수를 향했다. 흡사 재판장에 피고인으로 끌려온 것과 다름없는 최종수는 그럼에도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애초에 니들이 뭘 문제 삼는지도 모르겠는데.”

“…….”

“오히려 난 너네가 더 불안하거든? 아까부터 지랄 중인 거. 기상호 스킬 때문, 맞지?”

“…….”

“개소리 적당히 하고 까놓고 말해. 니들을 무슨 수로 믿는데?”

“……종수햄아?”

“퍽 기상호 취급이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 이딴 곳에 둘 바엔 내가 데려가는 게 낫지.”

“지금 무슨 개소리를.”

“그리고 기상호 너는 좋은 말로 할 때 헌터 때려치워라.”

“아니, 그.”

개판이다. 개가 왈왈왈왈 짖어도 이거보단 나을 것이다. 성준수가 무기를 들고 최종수에게 겨누려는 것을 김다은이 필사적으로 막고, 최종수와 기상호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와중에 둘을 향한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진정되기까지 한참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 작작 해라!”

유일한 일반인 이현성이 소리쳤다. 여기서 싸움이라도 나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현성은 죽는다. 스쳐 가는 공격 하나에 연약하게 픽,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를 알고 있는 성준수가 웃어른 공경을 위해 겨우겨우 진정했다. 짜장면 젓가락을 탁, 하고 내려놓은 이현성이 근엄하게 말했다.

“상호, 니 설명 빼지 말고 전부 말해라.”

“……넵.”

버릇처럼 경위의 ‘1234’중 은근슬쩍 ‘23’을 빼서 말하던 기상호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말해도 되나? 슬쩍 최종수를 보니 최종수는 여전히 심기 불편한 기색이었다. 와중에 기상호의 손을 꼭 잡고 놓지도 않는 게 불안함 마저 언뜻 보일 정도였다. 하는 수 없지. 기상호는 있었던 일들을 빼지 않고 전부, 있는 대로, 몽땅 말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A부터 Z까지의 설명을 전부 들은 성준수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최종수의 개인사야 알 바 아니라지만, 얽힌 문제가 복잡했다. 당장 최종수를 신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떠나서 새로운 난제가 도착하고 만 것이다.

“새 스킬도 생기고, 감정 커플 아이템에, 두 명이 생존 난이도 S급을 공략했고……. 그걸 말도 없이 협회에 신고했다 이거지?”

확실히 놓고 보니 한 명이 1급이라고 해도 9급과 함께 생존 난이도 S급을 공략한 건 이상하긴 하다. 기상호가 눈을 굴렸다. 짜장면 그릇을 정리하고 난 길드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건 최종수가 문제가 아니다. 협회에다가 어떻게 야부리를 털어야 기상호의 스킬이 들키지 않을 수 있냐의 문제다. 성준수가 고민했다. 적당히 보고서를 허위로 날조할 생각이었던 기상호가 눈을 굴렸다. 최종수가 알아서 지켜줬습니다. 이러면 충분히 해결될 텐데. 준법 시민 주제에 불법을 저지를 생각만 가득한 사람이 모인 자리.

이현성이 성준수에게 무언가를 수군거렸고 그로 인하여 엄청난 결과가 났으니.

[‘검은 태풍(S)’ 최종수님이 ‘지상최강’에 가입합니다.]

[최종수님의 등급은 ‘일반 길드원’입니다.]

기상호가 눈앞에 떠오른 창을 보고 눈을 비볐다. 이게 뭐지. 시스템 오류인가. 그가 눈을 다섯 번째로 비빌쯤 최종수가 시력이 손상된다며 기상호의 손을 다정하게 채갔다. 어째 위화감이 가득한 행동이었다.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지상최강이 느끼기엔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상호는 경악하기 바빴다.

“……이거 가입 초대랑 수락이 있어야……. 햄 설마 가입 수락 누른 거예요?”

“어.”

“왜?”

“왜라니?”

“그니까, 왜 저희 길드에…….”

“왜, 난 니 길드에 가입하면 안 되냐?”

“아니, 이전에 가입한 곳은 어쩌고요.”

“무소속으로 활동했는데.”

“그, 진짜요?”

“아까부터 같은 말 하게 하지 마. 그리고 너 어차피 다 읽을 수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거잖아.”

“저라고 만능은 아니거든요? 진짜 왜?”

“몰라서 묻냐?”

몰라서 묻는 거였으면 참 좋았을 것이다. 기상호가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자 최종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이 자리엔 다른 길드원들도 가득 있건만 어째 그들만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정희찬이 옆에 있는 공태성과 김다은에게 소곤거렸다. 믿어도 될 거 같네요. 공태성이 말했다. 점마 눈만 봐도 티난다 아이가. 김다은이 중얼거렸다. 손에 낀 건 설마 커플링임? 그러거나 말거나 최종수와 기상호의 그사세는 정점을 찍고 말았으니.

“그래도 종수햄이 저희 길드에 들어오는 건 쪼매……. 차라리 길드를 새로 만드시는 건 어때요.”

“너 내가 길드 만들면 들어올 거야?”

“아뇨? 전 지상최강에 남아야죠.”

“이새끼가 지금 사람을 갖고 노네?”

“이게 왜 갖고 노는 건지…….”

“야, 내 눈 똑바로 봐라.”

“음, 하늘색이 예쁜데. 오. 저기 초거대 갈매기가.”

“내 눈 똑바로 보라고, 기상호.”

“……종수햄 눈은 좀 부담스러운데요.”

“너 지금 나 버리겠다는 거냐, 설마?”

“얘기가 왜 갑자기 그렇게 흐르는지?”

“아까부터 티 나거든? 야, 기상호. 내 눈 똑바로 봐.”

“아, 그니까 눈은 좀 부담스럽다고요!!”

아주 염병을 떨고 있다. 난 너 아녔으면……!! 저 아녔어도 잘 살았겠죠. 지금 농담이 나와? 니가 내 첫키스까지 가져갔잖아! 아니 말은 바로 해야죠. 그건 구명 활동이었습니다만? 두다간 온갖 헛소리를 몽땅 할 기세다. 대충 시스템에서 무언가의 정리를 끝낸 성준수가 그사세의 두 사람에게 통보했다.

“시끄럽고, 정식 길드원 신고는 일주일 뒤에 할 거니까 이제 꺼져라.”

“예? 이렇게 내쫓는다고요?”

“피곤하다고 내내 징징거린 새끼가……. 둘 다 꺼져.”

“이렇게 내쫓는다고?”

계약 서류나 기타 등은 일주일 뒤에 줄 거고 지금은 임시 가입이고 등등. 일방적으로 할 말을 끝낸 성준수는 게이트에 휘말린 수고로 일주일의 휴가를 준다는 말과 함께 두 사람을 정말로 내쫓았다. 말로는 축객령이지만 실상은 한 달 내내 시달렸을 테니 쉬라는 배려였다. 더불어 최종수가 기상호를 팔아먹지 않을 거란 신뢰의 일부기도 했고.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성준수와 이현성의 의도를 전부 읽었지만 기상호의 의지와는 별개였다. 기상호가 황망하게 길드 건물을 쳐다봤다. 우리, 해야 할 말이랑 정리할 거 더 많지 않나요? 이렇게 얼렁뚱땅 처리해도 되는 거냐고. 1급 헌터 최종수의 길드 가입은 뉴스 토픽감일 텐데? 기상호의 수많은 의문은 노곤하게 몰려오는 피로로 인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할까. 게이트 안에서 잠을 청한다 해도 침대에서 푹 쉴 때랑 회복률이 다르다. 기상호가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최종수가 기상호를 따라갔다. 보폭도 맞춰서.

“……왜 따라오시는지.”

“…….”

“아 옷……. 옷은 나중에 세탁하고 정비해서 돌려드릴게요.”

“준다고 했잖아. 넌 내가 거지로 보이냐?”

“그게 아니면 뭔데요…….”

피로를 인식하지 못했을 때랑 상태의 차원이 다르다. 기상호의 말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어깨의 상처도 아직 덜 나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할 무렵.

“야, 기상호.”

“네에…….”

“나 똑바로 봐.”

“…….”

게이트 공략을 끝낸 이후 기상호는 최종수와 제대로 눈을 맞춘 적이 없다. 핑계는 수십 개도 더 댈 수 있지만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파도처럼 몰려오는 감정이 두려워서였다. 정확히는 그 감정에 익사하고 말 미래를 말이다.

계속 보면 저 감정에 익사할 것이다. 사랑이라고 축약하기엔 거대하고도 복잡한, 형용할 수 없는 불가해의 감정에.

그러나 언제까지고 눈이 마주치는 걸 피할 순 없었으니.

“……!!”

입술이 맞닿았다. 게이트에서 버프로써 몇 번이나 했던 행위가 이토록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이 더 이상 게이트가 아니어서? 현실로 끌려 나와서까지 꿈과도 같은 감정에 적셔지고 있어서?

“으, 숨 좀.”

어느 쪽이든 외면하지 못할 사랑에 익사하고 말 것은 뻔한 일이라, 기상호는 잠시라도 이를 마주하기로 했다.

호흡이 연결되고 감정이 하나가 된다. 스킬이라는 미지의 힘은 이를 가능케 했다. 이 벅참이 제 감정인지 상대방의 감정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입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온전히 하나가 된다는 감각을 느낀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짧게만 입을 맞댄 최종수가 똑바로 기상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최종수에게 있어 기상호는 이해 불가의 미지였지만.

“기상호, 네가 멋대로 구했으면 똑바로 책임져. 갖다 버리지 말고.”

“아니 내가 언제 버린다고……. 그리고 책임이라뇨, 말이 이상한데.”

“주웠으면 책임지라고.”

“이거 제가 주운 건가요? 햄이 절 간택한 게 아니라?”

“헛소리 적당히 하고 앞장서기나 해라.”

“……저희 집 좁아요.”

“그래서?”

“아니……, 됐어요.”

어쩌면 이미 사랑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익사했을지도 모르지. 기상호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최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상태 이상의 후유증 같긴 하지만, 뭐. 진짜로 싫은 건 아니었으니까.

9급 헌터 기상호, 어쩌다 인간 태풍 최종수에게 간택받다. 모쪼록 프네우마 아누스로 연결된 한 언제까지고 이어질 연이라지만, 태풍이 올 앞날은 어찌 될 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해결되지 않은 일도 산더미에, 확실하게 끝맺은 것도 없으니 우당탕탕 헌터 라이프는 이제 시작이라고 봐도 되겠다.

김마계

백업용이라는 이름답게 백업 할 때 말곤 잘 안옵니다. 프사 재강사(@4o4NF501)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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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상] 게이트 생존 지침서: 백업용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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